유기농 식당 준비 모임

요즘 성미산 마을에서는 여러 논의들이 가득합니다. 홍익대의 초중교를 성미산에 지으려는 것을 막고 생태공원화 하자는 것이 가장 큰 이슈입니다. 성미산은 성미산 마을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이념적인 산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 위에 다양한 이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을 서재가 그렇고 유기농 식당 논의가 그렇습니다. 저 역시 유기농 식당의 논의 안에 끼어 있습니다. 모임 안의 누군가 이야기한 데로 "있기만 해도 고마운 식당"을 원하고 아이와 마음 놓고 풍성하고 저렴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논의는 그러나 언제나 긴장감이 팽배해야 합니다. 돈이 오가고 긴 세월을 장수하려면 그만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성미산 마을은 이미 한 번의 실패를 더 경험했습니다. "성미산 차 병원"이 결국 해산 총회를 했다는 풍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성미산 차 병원을 이용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중고 자동차상을 하는 절친한 선배가 있어 늘 중고차를 구입했고 관리 또한 선배에게 늘 의탁하였으니 별다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안타깝게도 성미산 차 병원은 조합과 운영 주체 사이의 난처한 관계 때문에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조합이 사람을 고용해 적절한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는데 고용한 사람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 결과적으로 조합은 누군가의 일자리만 제공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번의 유기농 식당도 마을에서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김요리사의 결심이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걱정이 되었지요. 때때로 중심에 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효율 면에서 이로움이 많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중심이 흔들리면 조합 자체가 유명무실해 질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이 중심인 이곳에서도 여전히 그것은 고민거리입니다. 아래의 글은 유기농 식당 준비 모임을 다녀와서 기획자 출신인 스스로가 준비 모임에 던진 우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준비 모임을 잘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식당"을 만들고 긴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을까요? 노력 이전에 마음을 맞추는 현재의 상황을 잘 헤쳐 나가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람의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즘을 느낍니다.



 

유기농 식당 첫 모임에 다녀와서


오름입니다.

오늘 느낀 점 중에서 몇 가지만 추려서 써 보았습니다.

제가 시간이 지나면 생각의 단편들을 잘 잡지 못하는 스타일이어서…….



김요리사에 대해

먼저 유기농 식당이 잘 되기 위해서는 큰 전제 조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김요리사의 비중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말이지요. 유기농 식당의 발화가 김요리사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결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쉬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성을 논의하는 조합(? 일단 이렇게 칭하겠습니다.)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문제점은 바로 김요리사 자신이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오늘 나온 상당 부분의 이야기도 모두 김요리사에게 오로지 의지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요약하면 너를 믿고 큰돈을 투자할 수 있다. 너만 잘하면 모든 것은 문제없다. 너무 등골 빠지게 일을 시키면 안 된다. 라는 말들이 어지럽게 오고갔는데 그 말들의 이면에는 김요리사에게 너무 많은 책임과 의무를 덧씌우는 꼴을 스스로 자초하는 셈이고 이 모든 계획이 김요리사의 존재가 없게 되면 그것으로 끝인 프로젝트가 되어버리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꼴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합의 입장에서 김요리사의 존재적 가치를 식단을 짜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는 것이 맞다 생각합니다.

식당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요리사가 아닙니다. 식당에서 필요한 것은 그 식당에서 내어놓는 식단입니다. 그 식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지, 또 그 식단이 얼마나 생명력 있게 동일한 맛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요리사는 그것을 유지하는 일종의 도구이지요.

그 때문에 이번 조합의 결성을 촉진시킨 김요리사와 조합의 관계 맺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이 조합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감히 극언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식당은 식단에 의지해야 하지 요리사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식단을 짜고 관리하는 사람은 동일한 재료 하에서는 그 누구(식당에서 일정한 트레이닝을 거친 사람 정도)라도 준비된 재료가 준비되면 동일한 음식과 동일한 맛을 낼 수 있는 매뉴얼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 또는 그것을 훈련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김요리사의 존재적 가치를 한정지을 때 조합은 식단, 사업계획, 마을과의 관계, 조합의 역할 등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정상적인 관계 맺음이고 사업에 있어서의 순리라고 믿습니다.


저 역시 모든 분들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신뢰를 받고 있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성미산 사람인 김요리사가 새로운 조합이 결성될 때 그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게 될 식단을 책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적인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려운 결단을 한만큼 10년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자는 의견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합과의 관계는 그렇게 되어서는 조합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조합은 김요리사의 직장을 보장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좋은 의도의 조합을 만들었고 그 자리에 꼭 필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 김요리사를 선택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 결정을 신뢰할 수 있는지, 유효한지에 대해 늘 평가해야 합니다. 즐거운 동거는 6개월에서 1년까지 밖에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결국 검증된 상황에 맞게 행동하게 될 뿐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김요리사의 큰 결심으로 조합이 촉발되었다 해도 조합의 살아남고 오래 존속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김요리사의 비중을 “식단”으로 한정하는 선에서 가능한 작게 줄여야 하고 그 나머지 부분을 조합이 책임지는 형태로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김요리사에게도 부담을 더는 길일 것이고 늘 자신을 쇄신하는 일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오늘 송구하게도 조합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김요리사를 빼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한다고 감히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업 계획서

오늘 선수가 한 말 중 가장 귀 기울일 부분은 역시 사업기획서입니다. 단순히 6월까지 돈 걷고, 여름에 집 얻고, 가을에 오픈하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면 제가 볼 때 백전백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년 안에 이변이 없는 한 해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일이 잘 되려면 사업계획서를 짜고 계획서에 의한 로드맵 대로 움직이고 일을 분담해야 합니다.


사업 계획서를 짜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발기인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소액 출자가 아닌 공식 출자자로 분명한 의사를 밝힌 사람들을 완전히 확정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조합의 이념과 사업 방향을 정할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조합의 중추가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모여 사업 계획서를 함께 짜고 업무를 분담해야 합니다. 1주일에 한번은 모여 치열하게 토론하고 과제를 내고 그 결과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야 합니다. 아무리 조합으로 사업을 한다고 해도 허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의 사람들도 식당 하나를 열어도 창업 박람회부터 프랜차이즈 설명회까지 쫒아 다니고 상권을 분석하고 관련 서적을 읽는 등의 일을 하는데 우리만 김요리사와 기린이 잘 해 주겠지 하면 그 사업은 잘 되기가 참으로 난감합니다. 하다못해 요식업에 대한 법률이라도 조금은 알아야 사업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업계획서는 필수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트레이닝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합니다. 사업 계획서에는 다음의 네 가지를 필수로 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오늘 이야기한 “어떤 조합”인가? 에 대한 부분입니다. 꼬지도 이야기 했지만 이 부분은 우리의 운신 폭을 결정해 줄 것입니다. 이것에 따라 식단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후 소액 투자자를 유치할 때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될 것 입니다. 아마도 상당 시간 돈이 묶일 것이므로 어떤 유형의 소액 투자자인가를 결정하는 역할도 됩니다. 기본적으로 공익을 존중하고 따르면서도 이윤을 내는 조합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아마도 그 앞에 “마을”자를 붙이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데로 ‘있어서 감사한 식당’이든, 아니면 그 어떤 식당이든 스스로 규정해야만 우리 자신도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지 결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조직의 구조입니다. 오늘 선수의 말 중 주인 의식이나 오너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이야기가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틀린 이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직의 결정이 합의체로 가야지 특정 오너에게 힘 실어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조직의 구성에 대해 사업계획서에서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투자자가 중심이 된 운영위원회 또는 이사회가 있고, 하부 조직으로 식단(또는 요리)부, 운영부 등이 있고, 식단부는 요리만은 책임지고, 운영부는 식당 전체의 운영과 직원 관리 등을 하고, 이후 여력이 되면 사입부 등을 두어 회계 및 식재료의 사입만을 전담하게 하는 등의 조직 구성까지 하여야 합니다. 즉시 가동 형태가 되려면 미리 누가 맡을 지까지 결정을 보아야 합니다. 인건비 역시 확정을 해야 합니다. 시작 후에 이런 부분에서 잡음이 생기면 힘겨워집니다. 시작 전에 말을 맞추고 결정하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빼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소액투자자 건입니다. 소액투자자가 조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정의하지 않으면 후에 소액투자자도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지, 이익 배당에 있어서 어떤 권리를 가지는지, 식당 이용에 있어서 혜택이 주어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무수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투자가 아닌 소멸성 맴버쉽 개념을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순수한 투자자(주식 배당과 비슷한 의미의)로서 모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식단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요. 어떤 식단으로 할지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김요리사의 의견 뿐 아니라 전체의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 식단이 김요리사가 잘 할 수 있는 요리가 아니라 조합이 내 세우는 이념과 고객층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결정한 식단에 대해 김요리사가 트레이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결정된 식단은 최소한 몇 차례의 시식을 걸쳐 검증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두 차례 정도의 시식을 통해 식단이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오픈 전까지 재료의 조리 방법에 대한 표준화와 요리 방법에 대한 표준화 방안까지 만들고 검증하는 로드맵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 방안 안에는 식기류의 선택, 서빙의 순서와 서빙 타이밍까지를 포함하고 있어야 겠지요.


네 번째는 자금의 운영 방안입니다. 기본적으로 초기 출자금이 조합이 생산한 최초의 가용 자금입니다. 이것을 어떤 식으로 집행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로드맵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대로변에 좀 뻑적지근하게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장은 출자금 선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식당의 규모를 상정하고 보증금과 월세, 인테리어 비, 가구 및 식기류 구입 비, 식재료 사입비(이 부분은 식단 구성과 함께 매우 상세하게), 인건비, 기타 운영비 등을 계산하여 기본비용에 대한 총계를 초기 투자비와 매월 지출비로 나누어 뽑고 이에 대한 지출 계획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손익분기에 대한 계산과 그 시점에 대한 예측 역시 함께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략적이라도 운영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과 자금 집행 계획이 완성됩니다. (아마도 이쯤 하면 자금 조달 계획 때문에 마음이 답답해지겠지요.)


가능하다면 다섯 번째로 지속적 발전 계획에 대한 로드맵까지 있다면 좋겠지요.


이상과 같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되 적어도 앞의 네 가지는 6월에 출자금을 걷겠다면 그 전까지는 끝나야 합니다. 그런 다음 위 네 가지에 동의한다는 조건 하에 출자금을 걷고 그와 동시에 조합 결성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준비 단계라고 믿습니다.



오늘 첫 모임을 다녀와서 느낀 바 있어 주저리주저리 글을 썼습니다. 동의하시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이런 고민쯤은 모두가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짧은 일정 속에서도 우리가 소정의 결과를 얻으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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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


추기경을 추모하며

성직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그 근처까지는 가 보았지만 끝내 성직을 받지는 못했다. 자기성찰적인 동양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나는 계시적 종교인 가톨릭의 교리들이 어느 순간 삶을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의심 없이 믿고 있던 바가 갑자기 무너지자 결국 성직을 포기했다. 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한 70%의 학생들이 결국 중도 포기한다는 그 퍼센트에 포함되는 것을 자청했다.

겨우 20대에 삶을 바꾸었다고 말했을 만큼 그 일은 나에게 정말 큰일이었다. 모태신앙과 다름없는 신앙생활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영세를 받았고 열성적인 어머니를 따라 성당을 다녔다. 내 초등학교의 기억은 학교에 대한 기억보다는 성당에 대한 기억이 더 많았다. 학교는 6일을 다녔으나 성당은 7일을 다녔다. 첫 영성체를 하고 복사(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일)를 하면서부터는 거의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다. 추운 겨울 드센 바닷바람을 헤치고 새벽이면 혼자서 새벽 미사를 가는 것이 내 생활의 주요 일과였다. 그때 나이가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도 그 일은 계속 이어졌고 성직자가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길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삶이 바뀔 줄은 몰랐다. 내 반란은 도서관에서 일어났다. 열렬한 탐구열. 신화와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초세기 기독교 역사에 집중했고 그 많은 정보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들어왔을 때 당황스러웠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초세기(1-3세기 경)에 확립되어 신앙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쩌면 신의 계시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그것도 지역과 인물들의 정치 투쟁에 의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혔고 그 의심은 정보가 많아질수록 점점 진실에 가까워졌다.

신앙이라는 믿음을 위해 진실을 의심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계시적 종교에서 까논(Canon, 라틴어로 성서 또는 교리, 교회법)에 대한 의심은 곧 믿음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다. 신앙을 전파하고 굳건히 해야 하는 자가 그 근본을 의심하다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마저도 섭리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인가? 열렬한 탐구열은 어느덧 간절한 기도로 변경되었다. 지도 신부가 오히려 기도 시간을 줄일 것을 주문할 정도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대학원장 신부님께서 내게 무릎을 꿇으며 신앙이 깊어지려면 누구나 거쳐 가는 일이니 좀 더 기도하고 공부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간절한 말씀에도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군대까지 다녀오며 인내했으니 참으로 길고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런 내가 성직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도 나의 심정은 그 어려운 결정을 했을 때와 똑같다.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지만 신의 존재는 믿을 수 없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성직을 이어가는 자들. 특히 가톨릭 신부들에게는 무척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향했던 삶이었기에 좋은 감정이 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무리 안에 속해 있었음으로 그들의 삶의 일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탓도 있다. 그들 중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 대부분의 삶 역시 고단한 구도자임을 안다.

언제가 증명서를 발급받을 일이 있어 학교에 간 적이 있다. 방학 때였는데 우연히 후배 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학교를 떠난 지 꽤 되었으니 처음 보는 신학생이었는데 마음이 맞아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다. 그에게 헤어지며 해 준 말은 “기왕 가는 길이면 꼭 성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인들 특히 성직자라면 의당 걸어가야 할 길이 “성인”의 길이다. 요즘 이런저런 구설수에 시달리는 꽃동네 오웅진 신부를 보아도 성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알 수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만나는 인간군상 속에 신을 찾아야 하는 가톨릭 신부들에게 늘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스트레스일 것이다. 모든 스트레스는 늘 행동을 제약하는 자기검열의 발로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한 추기경은 상징적으로도 그렇지만 그분 자체도로 참 대단하신 분이셨다. 우파적 성향이 강한 주교들과 사회적 변화에 동참하고자 하는 좌파적 성향의 신부들 사이에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신 분이고 나름의 길을 언제나 제시하셨다. 힘든 시대를 강요받으며 사셨지만 그 중 다행이라면 추기경이라는 상징성 안에서 다른 주교들의 행보가 가려져 그나마 교회를 통합하며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법적으로 따지자면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는 동일한 신분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권한의 차이일 뿐 모두 주교로서 성직자다. 가톨릭에서는 지역 교회의 장을 주교라 하는데 해당 지역에서의 사목의 모든 권한을 가진 자이다. 초대 교회가 여러 지역 교회의 집합체였다면 그 각 지역 교회의 장을 주교라 할 수 있고 이들은 12제자와 바오로의 진전을 이은자들이었다. 12제자와 바오로의 사망 이후에는 공의회 등을 열어 각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조율하며 초기 교회의 교리 체계를 만들어왔고 지역을 대표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해 왔다. 이런 전통에 따라 한번 주교가 되면 파문 외에는 해임이 불가능하다. 그에 비해 사제는 주교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성직자가 아닌 성직을 위임받은 자가 사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제는 사제가 되기 위한 직을 받을 때 세 가지 맹세 중 하나인 충성 선서를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교에게 한다. 주교의 권한은 신에게 받은 것이지만 사제의 권한은 주교로부터 위임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 신부가 말썽을 부르면 성직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끝을 볼 수 있지만 주교가 말썽을 부리면 파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국 교회의 주교들은 대체로 강한 우파적 성향을 지닌다. 대부분 6.25를 거친 세대라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데다 관리자로서 상층에 있다 보면 보수적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주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주교가 되었고 한국 교회를 이끌 미래적 인물로 당시 최연소 추기경으로 직을 받았던 분이었으니 그 행로가 참 고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교회는 태생적으로 원죄를 가지고 있다. 비록 신앙의 자유가 이유였다 해도 조선 말 외세를 끌어들여 국력을 낭비하게 했고,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다. 강화도를 침략해 양민을 학살하고 왕조실록을 약탈해간 프랑스의 명분이 순교한 자국 신부들에 두었던 것도, 그 사실을 외국에 알리고 프랑스 함대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것도, 조선의 해도와 산천의 지도를 그들에게 제공한 것도 천주교인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으로는 성인이 되었을지 몰라도 주권국가의 입장에서는 분명 배신자요 매국노이며 스파이임은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원죄를 가진 교회와 영향력 강한 주교들 사이에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추기경의 행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던 명동 성당이 있기까지 추기경은 많은 인내와 설득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주교회의에서 추기경은 한 사람의 주교일 뿐 그것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결코 아니었다. 주교들은 끊임없이 추기경의 행보에 일침을 놓기 일 수였다. 추기경 역시 그런 주교들을 대 놓고 비난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교적 성향이 강하고 계시적 종교에 순종하도록 평생을 교육받아온 주교들이 차즘 신임 추기경의 권위를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추기경은 비로소 자신의 발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시대가 그렇게 만든 면이 강했다. 추기경이 핍박 받는 자들의 앞에서 스스로 목자가 되기 위해 나섰을 때 주교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서야 했다. 오히려 위기에 빠진 추기경을 구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추기경을 살리는 것이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이었음으로.


그런 의미에서 추기경은 원죄를 가진 지난날을, 현대에 이르러 시대정신에 부합되게 행동함으로서 그 원죄를 조금이나마 씻어 내는 쾌거를 만들어 냈고, 교회에게 과거가 아닌 미래라는 큰 선물을 선사했다. 시대정신을 따랐던 그런 노력은 사회적으로도 민주화의 길로 역사의 물길을 돌리는 데 일조함으로서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보루가 될 수 있었다.

이 모두는 추기경의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그 직에 걸맞은 나름의 소명에 제 몫을 다 한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가 바로 “성인”이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언제든 교황이 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추기경이라는 큰 이름을 헛되이 쓰지 않고 그 감투에 짓눌리어 허둥대지 않고 자기 머리에 추기경의 모자를 잘 어울리게 쓰신 분이 그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그 분의 선종 소식에 여러 사람이 전화를 해서 명동성당에 한번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안부 전화를 했다. 나는 별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분은 그렇게 번잡스러운 걸 좋아하는 분이 아니셨다. 내가 모셨던 신부 중 한 분이 그 분 비서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추기경께서 출장을 가시며 혼자 남게 되어서 추기경 사무실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사무실은 뜻밖에도 소탈했다. 이런 저런 가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후로 오랫동안 인상에 남았다.

언젠가는 티코에 동승해 타고 가시다 그것이 사진에 찍혀 광고에까지 쓰인 해프닝이 있었는데 그 정도로 권위와는 담을 싼 분이셨다.

하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스탠스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셨는데 교구장 자리를 내 주시고 은퇴를 준비하시면서 행보가 변하셨다. 시대의 아픔에 정면으로 도전하던 모양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 사회도 충분히 민주화가 되었으니 교회도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라며 명동 성당으로 찾아와 천막을 쳤던 이해 당사자들을 정중히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교회가 정쟁과 이권 다툼의 장소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사회적 갈등은 이제 사회 스스로 제어할 충분한 역량이 되었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줄어드는 이런 조치들은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그 이후로 언론을 통해 나오는 인터뷰 내용들은 하나같이 보수적 색체가 짖은 말들이 터져 나왔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셨다. 그 분 역시 최고 관리자가 가지는, 그리고 시대와 싸워왔으나 사회의 원로가 됨으로서 가지게 되는 경직성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추기경 자신은 기본적인 마인드로서는 그런 입장이셨으나 시대의 편향성에 저항하면서 좌파적 인상을 남기셨기에 그런 말씀들이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학교로 찾아온 추기경의 말씀이 기억난다. 그때가 교회력으로 축제일이었는지 아니면 학교 기념일 중 하나였는지 모르지만 추기경의 방문이 있었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추기경의 방문은 학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큰 행사였다. 미래의 사제이며 그 중 몇몇은 또 주교가 되어 한국 교회를 이끌 것이므로 신학생들을 정례 방문하는 것은 추기경으로서도 주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추기경께서는 미래의 새싹들에게 무언가 훈시를 하셨지만 그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추기경의 말씀이 있은 후에 학생 대표가 나서서 기왕 오셨으니 하루나 이틀 정도 휴가를 주십사 청원했다. 신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이 의무였고 학교 밖을 나갈 수 있는 기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으니 큰 청원이었던 셈이다.

한참 기분이 좋으셨던 추기경께서는 정색을 하더니 “여우같은 말(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런 뉘앙스의 표현이라 기억된다.)”이라 하시며 주위를 긴장케 하셨다. 그 다음에 한 말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내 이마가 왜 이렇게 들어간 줄 아느냐? (코뼈 바로 위 부분과 눈썹 사이, 실제로 추기경의 이마는 그 부분이 조금 들어가 있다.) 신부들이 하도 속을 썩여서 이마를 짚고 기도하느라 들어간 거다.

그 다음 말은 벌써부터 너희가 이러면 안 된다. 뭐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마에 대한 말씀만은 지금도 가슴에 또렷이 남아 있다. 얼마나 기도를 했으면 이마가 들어갔단 말인가?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이마가 들어가도록 기도를 해야 했단 말인가? 최고 관리자로서의 고뇌와 힘겨움이 함축된 말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으로 대표되는 시국 관련 일들과 사목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부조화 사이의 고민이 오로지 그의 이마에 자국으로 남아 세월을 지냈으리라 생각하니 그 후 추기경을 뵐 때마다 또 세월이 지나 불현듯 말씀이 이전과 달라져 당황스러웠을 때에도 그 말이 생각났다. 30년을 교회를 이끌어오며 교회의 미래와 자신의 후대를 생각해야 하는 분의 고뇌와 고충이 그 한마디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임으로.

말씀의 뉘앙스는 야단치는 말투가 아니어서 신부들 속 썩이는 부분에서는 모두 까르르 웃었던 기억도 난다. 그 소란의 결과는 아마도 하루의 휴가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노련하게도 추기경은 그 일을 학교장에게 위임하셨고 교장 신부님은 추기경의 권위를 생각해 학사 일정에 방해받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마도 라고 쓴 것은 너무 먼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삶이 바뀌었고 신을 버린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인형을 향하여”라는 시집이 삶을 바꾼 이야기의 결과물이 된 것과 또한 교회와 신이라는 이름을 떨치기 위해 오랜 세월을 나는 힘겹게 지냈다. 그 일들에 대해서는 될수록 눈을 감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소식에는 늘 관심이 가고 선종 소식에 이르러서는 그만 가슴이 철렁하고야 만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가 아니 한국 가톨릭교회가 아직도 내 마음 속 한구석에 뿌리처럼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싹 위에 무신론자가 된 내가 있고 아직도 성당에 나가야 한다며 성화를 하는 어머니의 그늘이 있으니.


굳이 명동 성당이나 지역 성당에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는 아들을 달래며 잊었던 옛 성가를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있었다. 먼 옛적 알았던 아저씨일 뿐인 그가 생각난 것일까?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기를. 천국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있다면 영면하시기를. 허공을 향해 오늘은 간절한 바람을 염원한다.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성지로 만들고 민주화의 보루로 교회가 들어서도록 한 추기경의 지도력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든 지도자에게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꺼져가던 민주화의 동력을 제공하여 오늘을 만든 밑거름이 되었으니 그 한가지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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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


선택에 관한 간단한 단상

대략난감

글을 쓰면서 난감한 것은 이런류의 글이 결정론의 신봉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선택이란 때로 선택적이지만 대부분은 맹목적이다.
선택은 애초부터 가치에 대한 수용자의 한계선을 정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어떤 선택은 수용자에 의해 버려지며, 어떤 선택은 취하지 못해 아쉬워하거나 더 큰 슬픔을 주기도 한다. 선택선택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용자는 선택이 수용될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의 넓이를 가져야 한다. 최상의 선택은 수용자가 수용 가능한 넓이를 가진 - 딱 들어맞는 가치를 얻었을 때이다. 버릴 수 있는 선택마저도 버릴 수 있는 넓이를 가지지 못하면 삶의 무게가 되어 수용자는 흔들린다. 딱 들어맞는 가치는 수용자의 넓이를 더욱 넓게 만드는 자가 발전의 형태로 성장한다.


선택이 맹목적이 된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수용의 한계를 넘는데 집착해 왔고, 가치를 채우는 일에 목말라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한 분야,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인간 스스로 일등의 가치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사회적 인간에게 주어진 제일의 목표이자 숙명으로 강요된다.


일등의 가치로 올라서기 위해 매워야 하는 자신의 빈자리들은 언제나 선택으로 채워진다. 뛰어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인간은 최상위의 목표를 위해, 스스로 한계를 만든 인간은 그 한계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무언가를 결단하며 선택한다.


선택의 욕구는 소유를 수반하며 권리를 한정한다. 한정이란 뚜렷한 경계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소유의 수반과 권리의 한정이 선택으로 규정될 때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택은 욕망의 일환이다. 욕망은 한계의 굴레를 넓히는 도구이며, 욕망의 표현은 선택이다.


수용의 한계선이라는 외줄 위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인생이고 보면 벌린 양손의 균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선택이란 그 무엇도 가능하나 그 무게만큼은 일정하지 않다. 욕망의 강렬함이 선택으로 함몰될 때 목표는 상실되고 균형은 무너진다. 최상의 목표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최상의 선택을 향한 욕망은 불같고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유혹의 긴 계단을 오르기를 요구한다. 최고의 꼭짓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쳐야만 하는 운명의 유혹이 있고, 또한 이겨내야 할 도전들이 기다린다. 아무 의미 없이 날뛰는 것 같은 야생마도 자신이 가야 할 길과 그렇지 않을 길을 구분한다. 다만 그 길의 끝을 모를 뿐이다.


무엇이 되었건 최고의 꼭짓점에 있는 선택은 유혹의 긴 계단을 오르고 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다. 선택이 갈림길이 되었을 때 지표가 되는 것은 신념과 인내와 투지다.
목표하는 바가 있는가?
목표가 신념이 되면 모든 삶이 그것을 향하게 된다. 머나먼 그 길을 그것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은 인내다. 인내는 투지가 뒷받침될 때 성장하며 활기를 얻는다. 투지가 솟구치는 비법은 열렬한 신념을 갖는 것이다. 선택은 신념의 결과이며, 선택의 쟁취는 인내를 통해 자기 가치를 선택의 폭만큼 넓혔을 때 가능하다. 투지는 선택이 안착되도록 땅을 가꾸는 동력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의 한발을 내딛게 만드는 신념이 사람을 향해 있었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선택과 손잡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희망이 되는 선택으로 신념이 길을 인도하고 의지가 그 힘이 되며 투지가 그 길을 열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욕망이 들끓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굴레 안에 갇혀 서로가 서로를 밝고 일어서서 오로지 한 꼭짓점을 향해 치를 떨며 가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의 그늘에 한 줄기 햇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꿈같은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선택은 예측될 뿐 미래의 끝은 알 수 없다. 기왕 알 수 없는 끝이라면 유혹에 현혹되고도 운 좋게 성공하는 이들보다 조금 힘들더라도 밝은 세상 (지배하는 것이 아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선택이 내가 가야 할 길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요약하면,
인생을 살아가며 수만 번 해야 하는 선택은 돌아보면 삶이 살아 온 지표다. 선택이란 삶에 대한 오늘의 가치관이며 대부분 미래의 삶에 대한 결과로 다가온다. 인간은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며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그 세상을 형성한다. 기왕에 그 세상이 밝고 아름답기를 염원한다면 모든 개개인의 작은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족 : 얼마 전 다시 탈고한 소설 보물은 자신의 삶이 처한 현실을 만년필옥반지라는 소재를 통해 선택의 가치와 그로 인해 삶이 전환되는 세태를 진지한 어조로 그려본 것이다. 선택의 순간 기왕 한 발을 내딛을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을 향한 밝은 신념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삶이 성장하고, 그 성장이 세상을 향한 맑은 공기가 되면 세상사람 모두 가슴 한 구석에 꿈꾸듯 가지고 있는 이상향을 실현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염원을 담기 위해 노력한 글이다. 선택이라는 용어를 쓰다 보니 문득 다시 소설 보물이 생각난다.



이 글이 쓰인 메모를 보니 2006.2.15이라고 쓰여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시기는 나 자신도 회사도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당시 몸 담았던 싸이버뱅크는 매우 힘들었다. 국내 PDA 폰 시장의 1위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대기업의 시장 진출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사내 개발 스케줄도 고무줄 같았다. 비전과 리더십의 부제로 인한 총제적인 난국이었다. 회사의 기획부서 팀장 자리를 꿰차고 있던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근본적인 대안은 있었으나 난마처럼 얽힌 기업내부의 사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는 계속되어 나에게도 연락이 온 터라 생각이 뒤숭숭했다.

아마도 그때 선택이라는 말이 참 가슴을 아리게 했던가 보다. 게다가 그날 회사의 중요한 파트너에게 내가 차지하고 있는 직책과 업무의 체계 때문에 원하지 않는 메일을 보내야만 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매우 현명하지 않은 결정에 의한 것이었고 앞날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총대를 멨다. 조직에 몸담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런 울컥한 상황이니 시인詩人을 자처하는 자가 낙서에서 시작해 결국 이런 글을 낸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의반타의반 결국 회사를 퇴사했다. 그 동안에도 나는 회사를 이직하지 않았다. 몇 해를 함께 한 동료들에 대한 의리와 회사의 간부로서 어려울 때일수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룬 것은 없었다. 그저 빈손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남았던 그 결정은 현명한 일이었을까 자문해 본다. 결과적으로는 아니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거의 1년을 쉬었다. 그 동안 나는 아들 산이와 정서적인 공감대를 높일 수 있었고 한권의 책을 집필했다. 아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높인 것은 이 시기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며 성과였다. 필집한 원고 역시 거의 마무리되어 원하는 방향으로의 출간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선택들이 나에게 과연 어떤 길을 열게 할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인내가 내 길을 열게 하고 투지가 그것을 뒷받침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한 나의 신념이 결국 또 다른 내 길을 밝은 빛으로 인도해 나갈 것이라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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