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 의사이셨던 공병우 박사님은 한글의 세벌식 자판 체계를 만드신 분이다. 아래한글이 탄생하는데도 많은 기여를 하셨고, 한글 과학화에 이분만큼 노력하신 분도 드물다. 더구나 세벌식이라는 한글 창제 원리에 가장 적합한 자판 구조를 타자기에서 워드프로세서 그리고 컴퓨터 자판에 이르기까지 만들어 내심으로서 우리글의 우수함을 스스로 입증하신 분이다.

평소에도 결벽증에 가까운 괴팍한 성품으로 이름나셨고 한글 과학에 미친 제자들을 힘닿는 데까지 거두신 일화도 유명하다.

아마도 세벌식이 대한민국의 컴퓨터 자판의 첫 번째 표준이 되었다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 텐데 무지한 정권과 그에 부하 뇌동하는 자들로 해 두벌식이 표준으로 정착하면서  겨레에 큰 허물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 역시 그 분을 단 한번 뵈었으나 단숨에 그를 존경하게 되었을 만큼 그 내공이 대단하신 분이다.

또한 사후 한 달이 지나서야 그 분의 죽음이 알려졌을 만큼 대단한 유언을 남기셨다.

자신의 장기 중 쓸만한 것은 적출하여 다른 환자를 위해 기증하고,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이나 해부학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게 의과대학에 제공할 것.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사후 24시간 내에 화장이나 수장할 것. 여의치 않아 매장할 때는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 최소한의 면적에 매장할 것. 죽더라도 남에게 알리지 말고 추도식이나 장례식은 하지 말 것. 유형무형의 재산이 있을 시에는 신체장애자 특히 앞 못 보는 장님들을 위해 복지사업에 쓸 것 등.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기 적합한 감동적인 유언이었다.

마땅히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는 현대에서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이다.

셀프북 인터뷰

언젠가 산에 다니는 내 선배는 결혼 전 아내를 처음 소개하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자기 팔을 하나 잘라주어도 아깝지 않은 후배라고. 그러니 믿어도 좋을 그런 녀석이라고.’

선배는 정말 나를 아꼈고 나 또한 그 선배를 좋아했고 무척 따랐다. 꽤 긴 세월 동안 산을 함께 다니며 한 자일 끝에 연결되어 삶을 나누었으니 무엇을 나누어도 좋을 그런 상대였다. 자일 파트너인 내 친구와 산악회를 제외한다면 산을 다니며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타국의 하늘 아래 있지만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내게 그런 후배가 있다면 아마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하나가 단연 소순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윈도우NT 쪽에서는 촉망받는 저자이기도 했고, 한글과컴퓨터 재직 시절 내 후배이기도 했다. 세간에는 윈스라는 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순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성격이 화통하고 무엇이든 꾸밈이 없는 데 있다. 어떤 일이건 주눅 들지 않고 성취하려는 강한 욕망을 감추지 않는 것은 그의 강점이다. 다만 대상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자주 들어나고 전체적인 조화를 부리는 면이 좀 약한데 이제 나이를 먹어가고 곧 아기 아빠가 될 사람이니 관록이 쌓였으리라. 오늘 우연히 메일을 정리하다 그에게 보낸 메일 중 하나를 찾았다. 2005년 4월 30일에 보낸 글인데 자신의 홈페이지인 셀프북에 인물 인터뷰를 실어야 겠다고 나를 조르고 조른 끝에 받아 간 글이다. 그래도 자신의 블러그에 게재할 만한 인물 중 하나로 나를 지목했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대한민국 대표 인터넷 포털 중 하나인 N사에서 맹활약 중이다. 아래 글은 순식의 블러그인 셀프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터뷰 내용이 당시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의 일이 기억나 미소가 걸린 김에 다시 옮긴다.



1. 성함과 간략히 하시는 일 20자 이내로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태근입니다. 현재 하는 일은 PDA 폰을 전문으로 만드는 싸이버뱅크에서 PDA폰 관련 기획 일을 하고 있습니다.


2. 요즘 스마트폰 제조 업계 동향은 어떻습니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20자 이내 설명 부탁드립니다.)

“또 다시 기회가 왔다. 그러나 올해가 고비다. 잘해서 장수하자.”
비록 싸이버뱅크가 현재는 1위를 하고 있지만 대기업에 비하면 벤처기업에 불가하다. 관련 업계에서는 ‘올해가 마지막 기회다.’라는 위기감이 팽배한 상태. 이쪽 역시 시장이 대기업으로 재편되어 가는 양상이고 보면 작년까지는 LG와 싸워 업계 1위였으나 삼성과 LG가 점점 깊게 들어오는 현재는 장담하기가 힘들다. 아이리버와 같은 신화를 만들 것인지, 좌초할 것인지는 올해가 관건일 듯…….


3. 결혼하신지 이미 3년이 넘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내 자랑 부탁드립니다.

지난주가 3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지난해까지는 여행을 갔는데, 올해는 우리 아기 “산”이가 강림하신지라 오랜만의 외식으로 조촐하게 기념했다. 그 자리에서 집사람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며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서 심정적으로 많이 안정된 것이 사실이다. 살아온 날이 아직은 짧다 할 수 있지만 스스로는 질풍노도와 같이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것은 어머니와 집사람일 것이다.

집사람의 자랑이라면 나에게는 이상적인 여자라는 점이다. 일 잘하고, 예쁘고, 싹싹하고, 남편 사랑하고, 애기 잘 키우고……. 농담 삼아 흔히 하는 그런 말들에 모두 해당한다. 하지만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사상적인 지향점이 비슷한데서 오는 동질감이다. 그 때문에 의기투합이 잘 된다. 오래 고민하였지만, “양평”으로 집을 옮긴 것도 집사람의 흔쾌한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성격은 좀 다른데, 내가 느긋한 편이라면 집사람은 급한 편이다. 때때로 그것이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 간의 단점을 보안해 주는 역할도 한다.

집사람에 대한 자랑을 단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온라인상에서 집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쭈님”이라고 부르는데 주인님의 쎈 발음이라고나 할까. 스스로는 이 명칭을 존경의 표시로 사용하고 있다.


4. 쓰다만 소설작품의 수와 앞으로의 작품 계획은?

아직까지 “보물”을 다듬고 있다. 벌써 몇 년째 쓰고 있는데, 주력할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중편으로 완결했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에피소드를 추가하다 보니 점점 장편이 되어가고 있다. 에피소드 하나를 더 추가하고 있는데, 이제까지 가벼웠던 전개가 점점 무게감이 생기고 있어 이를 이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보물” 후속편으로는 현재 추가한 에피소드를 따로 떼어내 완결판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다. 그 외에 만들어 놓은 작품 노트 중 작품으로 완결하고 싶은 것이 현재로서는 약 5편 정도 된다. 하지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것이 늘 고민이다. 전업 작가로 나서기에는 아직 마득치 않은 부분이 있다.


5. 휴대폰 등의 새 제품을 손맛을 느껴보고 출시한다는 S전자 CEO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최종 제품을 받아보는 CEO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제품을 기획하고 제품이 출시될 때까지 개발 과정 전반에 관여하고 있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실무자이자 관리자로서의 현재의 자리는 늘 긴장의 연속이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개발을 진행하다 스펙 아웃을 시켜야 하는 경우다. 일정 때문이든, 관련 부품 업체가 대응을 못해 주는 것이 문제이든, 때로는 개발 역량에 비해 너무 미래적인 선택을 한 때문이든 원래의 기획 의도에서 멀어지는 스펙 아웃은 늘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제품 자체가 그것 때문에 세상에 나올 수 없다면 더 슬픈 일이기에 어느 선에서는 타협을 한다.

전체 로드맵을 쥐고 있는 입장에서는 손 맛 보다는 불안함이 더 많다. 현재 근무하는 회사는 최첨단의 제품을 주로 만든다. 엔지니어 출신의 CEO를 모시고 있는 덕분으로 세계 최초의 WinCE를 채택한 PDA 폰 출시를 기화로 세계 최초의 무선랜 탑재 네스팟스윙 폰을 낸 바 있고, 세계 최초의 DMB PDA 폰 출시를 앞두고 있다.

최초라는 의미는 최고 기술의 타이틀이 될 수는 있어도 기술적 무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새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적어도 나에게는 희열과 불안이 교차하는 외줄타기를 하는 셈이다.


6. 어떤 디바이스가 되었건 처음 집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보십니까?

역시 디자인이다.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 있다 보니 디자인이 기능에 미치는 영향과 기능 향상에 대한 디자인 요소에 관심이 많다. 이른바 “멋진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근무하는 회사에서 미래를 대비해 투자해야 할 부분의 첫째를 꼽으라면 역시 디자인이라고 늘 생각한다.

얼마 전 L사에서 나온 경쟁 제품의 샘플을 본 적이 있다. 평소 생각해 왔던 디자인 요소들이 잘 가미된 “멋진 디자인”이었다. 그 디자인은 어느 정도 극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 아마도 채택 과정에서 큰 논란이 있었을 것이다. 디자인의 발전을 위해서는 수요 계층보다 개발 및 적용 계층의 열린 눈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제품이 세상에 빛을 보니까. 그런 고민을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향후 그 제품이 히트한다면, 단순한 컨셉 제품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나라 폰 디자인 역사를 몇 년은 앞당겨 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제품이 경쟁 제품이었기에 그날 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과감함은 오히려 벤처기업에서 시도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인데 상항은 늘 그렇지 못하다.

때로는 벤처기업이 더 보수적이며 모험을 싫어하기도 한다.


7. 존경하는 분과 그 이유는?

공병우 박사님.

나의 관점에서는 그 분은 삶이 풍족하셨던 분이다. 따지고 보면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신 분이셨고, 어려움도 그리 많이 겪은 분이 아니고, 게다가 존경까지 받으며 사신 분이며, 삶의 족적도 많이 남기셨다. 하지만 내가 그분을 존경하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자신이 믿는 것을 끝가지 주장할 수 있는 것, 확신을 가진 삶과 그것에 대한 투신을 존경한다.

내가 그분에 대해 보내는 존경은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세벌식 자판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로 잡지에 개제한 글이 있으니 그것을 읽어본 분이라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도 썼지만, 그분을 딱 한번 뵈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강연이었던 것 같다. 그때 보았던 90세의 노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살아온 삶에 대한 의지이며 투신의 반영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당연히 세벌식 자판을 쓰고 있는데, 그분에 대한 존경이 지속하는 한 세벌식 자판을 쓰게 될 것이며, 그 우수성에 대한 전도사가 될 것이다.


8. 산을 오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쟁이로 잘 알려진 덕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다.

빚진 사람처럼 항상 마음속에는 산이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니 산이 소원하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거창하게 말하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일도(一道)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산을 오르는 동안 육체는 점점 이완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흠뻑 젖은 몸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듯 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은 집중의 과정이다. 몸이 고단하고 약간의 스릴을 즐길 수 있는 위험이 동반될수록 집중은 강해진다. 집중은 몸 안에 쌓여 있는 온갖 분심과 잡념을 정화한다. 정화되는 그것을 스트레스라고 말해도 좋고 삶의 때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을 훨훨 털어 내고 산의 정기를 받아 하산을 하면 정신과 몸이 맑아짐을 느낀다. 산은 그 수단이며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산이기에 더 집중되는 것이다.

스스로 심취해 있으니 더 몰입하기 위해서는 자화자찬도 필요하고 개똥 철학도 필요한 법. 그 과정과 결과를 나는 도(道)라고 말하고 싶다. 도가 별건가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도는 도(道)다. 스스로에게는 말이다. 또한 성취감, 빛나는 산의 풍경, 삶을 나눌 수 있는 산 친구와의 조우 등은 산이기에 언제나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인생이라는 긴 길에서 스스로가 정화되고 새롭게 마음을 다독이며 격려해주는 그 길이 산이기에 ‘오른다.’고 할 수 있다.


9. 이 세상에 산이 없고 평지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다른 대상을 찾을 것 같다. 바다라든가, 강이라든가, 그곳에서 집중을 극대화할 수 있는 약간의 위험을 즐기며 살고 있지 않을까? 산을 찾는 것이 일도(一道)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산에서 얻게 되는 집중의 과정을 반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상을 찾지 않을까 싶다.


10. 이 세상 모든 산을 등정한 뒤라면, 무얼 하시겠습니까?

그런 행운이 내게 찾아온다면 아들 “산”이와 함께 이제까지 오른 모든 산들을 다시 한 번 오르고 싶다. 물론 집사람도 함께…….

몇 해 전 설악산 공룡능선에 들어갔을 때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온 부부와 잠시 동안 같이 산행한 적이 있는데 참 부러웠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나와 집사람이 그간에 경험한 삶을 나누고 더불어 “산”이가 성장하며 새롭게 바라보는 인생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긴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왠지 가슴 벅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1. 향후 3년간 계획이나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겠다.’고 목표한 계획표에 거의 근접하며 살았다. 새해를 시작할 때쯤이면 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고, 목표를 점검하고 수정한다. 현재 개인적인 가장 큰 목표는 소설 “보물”을 완료하는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계획이 있지만 발표하는 것은 좀 부적절하다.


12. 가장 좋아하는 인간형과 싫어하는 인간형은?

스스로도 양면의 날처럼 싫은 면과 좋은 면이 있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와 유사하다. 좋은 면이 있으면 싫은 면도 있고, 싫은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판단은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에 귀결되도록 노력한다.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희망을 걸 것은 결국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항상 품고 있다.

모두 다 좋을 수 없듯, 모든 면이 싫은 것도 아니어서 될수록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계속하는 편이다. 특별히 싫은 사람은 과불급한 사람이다. 너무 모자라거나 넘치면 함께 하기가 참 힘들다. 결국 ‘상식을 지키자’인데,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를 빼면 대부분 좋아한다.


13. 셀프북에 왜 오십니까?

순식이가 항상 알림 쪽지를 날려주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14. 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장 감명 깊게 읽으신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스스로는 독서를 많이 하는 편에 든다고 생각한다. 사상, 역사, 과학, 문학 류에 책을 좋아한다. 깊게 집중할 수 없는 요즘은 짧은 시간 안에 독파할 수 있는 가벼운 책 위주로 많이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치며 “아!” 하고 감명을 받았던 책은 딱 3권이다. 한 권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고, 다른 한 권은 독일 여성이 쓴 “나는 나” 라는 책이고, 나머지 한 권은 “앤소니 드 멜로” 신부가 쓴 “일분 지혜”란 책이다. 세권 다 어느 한 대목에 이르러 전율하듯 몸을 떨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그 당시의 상황이나 성장의 단계에서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문장, 그 언어가 가슴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항상 마음에 걸리는 책이 하나 있다면 “삼국지”다. 집에서 읽던 삼국지는 백과사전처럼 큰 양장 포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진 한 권짜리 책이었다. 내게는 아버님의 유품이었고 아버님은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늘 그 삼국지를 꺼내들고 읽으셨다. 그러면 마음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신다고 했다. 나도 그 책을 한동안 그렇게 읽었다. 큰 책을 펴 놓고 정신없이 읽다보면 일은 어떨지 몰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스르르 풀렸다. 어느 날 아는 선배가 병원에 입원하여 삼국지를 읽고 싶다고 하여 빌려 주었는데 그만 잃어버려서 가슴이 찢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헌 책방을 갈 때마다 똑같은 삼국지를 늘 찾는다. 하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는 못했다.


15. 편집을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원고가 있었다면?

편집이라? 이 말은 용어상의 문제가 있다.

책과 관련해 주로 일했던 컴퓨터 관련 서적 쪽에서 말하는 편집자란 지면의 배열을 요구받는 디자이너의 역할이나 오퍼레이터의 역할을 의미한다. 컴퓨터 서적이 아닌 일반 출판 쪽에서 말하는 편집자는 책의 성격과 방향을 규정하고 책이 독자와 만날 수 있도록 세부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컨트롤하고 조정하는 리더인 커뮤니터를 의미한다. 용어상의 엇박자를 해결하기 위해 컴퓨터 출판 쪽에서는 디자이너 계열을 지칭하는 편집자 대신 편집자인 자신들을 가리켜 기획자라 부르는 것이 통례다. 용어상의 혼돈이라고 할까.

질문에서 의미하는 편집이 컴퓨터 출판 계열의 편집이어서 디자인과 연관된 것이라면 사실 내가 편집한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참 출판 일을 할 때 내 손때를 묻혀 출간한 책은 약 200여 종이 조금 넘지 않나 싶다. 컴퓨터 출판 쪽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대부분 기획자로서 참여한 것이고 직접 쓴 책도 약간 있고, 릴라이트를 한 것과 편집자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을 한 것도 있다. 전체 종수를 놓고 일반 출판의 관념으로 보면 편집자로서 책을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원고는 물론 순식의 원고도 있었지만 윤원근씨의 원고이지 않나 싶다. 친동생이면서도 프라이드 강한 저자이고, 이미 독자층을 형성한 인지도에, 원고를 집필하는데 나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출간을 위한 설득이 참 싶지 않았다. 원고라는 것이 결국 필자의 생각과 경험과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편집자는 그것을 받아 비용을 지불하는 독자가 원고를 기쁘고 즐겁게 소화할 수 있게 하는 교두보 역할의 연결자에 속한다. 그러니 편집자는 독자가 원하는 부분을 더 끌어내야 하고, 때때로는 독자가 돈을 더 지불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요소를 가미해야 한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차에서부터 문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간섭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좀처럼 설득이 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는 필자는 참 힘들다. 탄탄한 원고일수록 방향을 돌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필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과 그 분야의 식견을 갖고 있는 자라면, 편집자는 독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에 대해 나름대로의 식견을 가진 전문가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협상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도 가장 힘겨운 상대가 아니었나 싶다. 다행인 것은 그런 치열함 속에서 나온 책들이 대부분 훌륭한 결과를 달성한 점은 위안이다.


16. 다음 인터뷰로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으시다면?

윈스 - 자승자박도 좋다.


17. 셀프북에 오시는 좋은 님들께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순식의 마수에서 벋어나자. ^^

순식과의 좋은 인연이 삶에 대한 연대감을 이어가는 가교가 되었으면 좋겠고, 셀프북도 오래도록 즐겁게 운영해 기쁨 두 배 만들어 가는 일상의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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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


Hello-PC 1996년 2월에 실린 글이다. 앞선 전편의 다음 작이라 할 수 있다.

주제가 무엇인지 지금에 와서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다음 달 글을 쓸 준비를 하던 중에 갑자기 기자에게 연락이 와서 세벌식 활용 편을 써야겠다는 급한 전갈을 받았다. 반응이 뜨겁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활용법이 없어 독자들의 요청이 많다며 세벌식을 한 번 더 쓰자고 해 글의 방향을 바꾸었다.

1월호글은 지금 읽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는데 2월호의 글은 프로그램 활용이라 10년 넘은 참 오래된 글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캡처된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옛 냄새가 난다.



정신없이 바쁜 주간을 보내느라 세벌식에 대한 기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뒤늦게 새로운 원고 청탁을 받고서야 자료실로 달려가 Hello-PC를 열고 활자로 된 기사를 읽어보았다. 많은 분들이 세벌식의 우수함을 자랑만 했지 실제로 세벌식을 익히는 방법과 이벌식에서 세벌식으로 바꾸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아 그 방법을 궁금해 한다는 기자의 말을 들으면서 아차 싶었다. 공한체를 보며 가슴의 열정을 삭힐 수 없어 정신없이 쓴 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감추었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슴만은 뿌듯하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세벌식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가지고 새로 시작하거나 바꾸어 보고 싶은 열정이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그런 질문을 던진 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벌식을 사용하던 때의 필자와 같은 힘겨움 때문에 바꿈을 절실히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이런 모든 분들을 위해 세벌식을 익히는 타자 연습 프로그램의 소개와 연습 방법, 도스 및 윈도우즈3.1, 윈도우즈 95, 매킨토시,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워드프로세서인 아래한글에서 세벌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단 여기서의 설명은 각 프로그램의 기초 설명이 아닌 필요한 부분만을 설정해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것 이외에 관계되는 사항이 있으면 직접 그 프로그램의 매뉴얼을 참고해 보기 바란다.


이벌식 위주로 된 컴퓨터 잠시 쓰기

자판을 막 바꾸기 시작한 독자들은 자신의 컴퓨터 이외에 잠시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을 때 매우 난감함을 느낄 것이다. 당연한 것이 글자를 입력하려고 키보드를 두드리면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의 조합이 엉망이 되는 것을 보고서야 “아차! 나 세벌식으로 바꾸었지”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한다. 컴퓨터에 입문한 연차가 조금 되는 사람이라면 모처럼 초보자인 컴맹 직원에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다 타자도 제대로 못한다고 그만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는 이번 기회에 세벌식을 꼭 익혀보겠다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며 연습을 해 왔는데 막상 도스, 윈도우즈, 아래한글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려고 당당히 컴퓨터를 켜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컴퓨터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제멋대로 글자를 입력해 버리는 것이다. 글자판을 교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실력만 발휘하려다 그만 기가 죽고 만다. 그런 일이 겹치면 자연 주눅이 들어 자판을 바꾸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꼬리를 내린다. 이렇게 포기하고 말 것인가?

이제 세벌식 활용의 비장의 카드를 한 번 만들어 보자.

기왕에 바꾸기로 한 세벌식 자판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워지고 - 우리 글 창제 원리에 맞는 자판이니까 - 타자 실력도 쑥쑥 오를 자판을 멋지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타자 연습 프로그램으로 세벌식 배우기

세벌식을 잘 사용하려면 아무래도 타자가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어야 한다. 세벌식은 보통 조금만 연습해도 200~300타는 거뜬히 나오기 때문에 잠시 연습을 하다 여기에 만족해 그만두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지만 자판의 특성상 조금만 꾸준히 연습하여도 대부분이 400~500타를 넘길 수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랑스럽게 타자할 수 있을 것이니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벌식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타자 연습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특히 자판을 처음 익히시는 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전 호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2벌식을 익혔던 독자들 중 세벌식으로 전환하는 경우라면 더욱더 타자 연습 프로그램을 사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익숙한 자판을 버리고 새 자판을 익힌다는 것은 자신에게 굳어진 가장 큰 버릇을 바꾸겠다고 공헌하는 것과 같은 비장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 비장함을 가장 힘 있게 도와 줄 수 있는 최선의 도구가 바로 타자 연습 프로그램이다. 타자 연습 프로그램은 여러 종류가 있다. 초창기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한메타자, 아래한글과 함께 번들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한글타자 그리고 통신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공개용 프로그램 등 ……. 특히 통신으로 배포하는 공개용 타자 프로그램들은 초보 프로그래머들이 열정을 가지고 만든 것들이라 기능과 아이디어들이 기발하기까지 하다. 자판에 대해 고민하고 계신 분들 중에 통신을 접하시는 분들이라면 자료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한메타자, 한글타자를 소개하기로 한다.


한메타자 사용하기

우리나라 타자 프로그램의 효시라고 할 만큼 초창기에 큰 역할을 했던 프로그램이다. 불법복제가 당연시 되던 시절에 나와 큰 판매는 이루지 못했지만 아직도 학원 등에서 가장 애용하는 연습 프로그램이 되었다. 전통의 한메타자에서 세벌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한메타자를 컴퓨터에 설치한 다음 한메타자를 기동시켜 “메뉴에서 시작”을 선택한 후 한메타자 메뉴의 “환경설정”을 선택하면 된다.


한메타자교사 초기 실행 화면

한메타자교사 초기 실행 화면

한메타자교사 환경 설정

한메타자교사 환경 설정


그림에서 보듯이 “타자 학습 종류”에서 “한글”을, “한글자판”에서 “세벌식”을 선택한다. 여기서 메뉴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메뉴에 커서를 가져도 놓고 스페이스 바를 누르면 된다.


한글타자 사용하기

아래한글에 번들되면서 많은 보급이 이루어진 제품이다. 도스용 아래한글 3.0 이상의 정품을 가지고 있는 사용자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도스용과 윈도우즈용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용방법은 한메한글과 거의 유사하다.


한글타자 초기 화면

한글타자 초기 화면

한글타자 환경 설정

한글타자 환경 설정


별 의미는 없지만 도스에서 세벌식 사용하기

타자 연습으로 세벌식에 점점 자신이 붙는다면 이제는 슬슬 도스로 나가보자. 요즘은 대부분 도스용 프로그램들도 자체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도스 상에서 한글을 입력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데이터베이스나 클리퍼 등으로 짠 각종 회계나 관리 프로그램 등은 아직도 주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이것들은 도스 상에서 한글 바이오스를 통해서 한글입력이 가능하다.

도스에서 한글을 쓰기 위해서는 한글 바이오스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한글도스에서 지원하는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인 HBIOS는 세벌식을 지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스에서 세벌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따로 세벌식을 지원하는 한글 바이오스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태백 한글과 한맥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태백 한글과 한맥을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1. 먼저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2. 프로그램 설치 시에 어떤 자판을 사용할 지를 물어 본다.
3. 사용 자판을 세벌식으로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으로 끝이다. 이미 설치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자판을 바꾸려면 설치된 디렉터리로 가서 태백 한글은 config.exe를, 한맥은 hmccfg.exe를 각각 실행시킨다. 각 프로그램이 실행되면 해당 메뉴로 가서 자판을 3벌식으로 바꾸면 된다. 반드시 한영 전환키를 무엇으로 설정하였는지 확인한 후 바꾼 내용을 저장하고 빠져 나온다.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한영 전환키를 누르면 이후로 한글을 세벌식으로 입력할 수 있다.


태백 한글 환경 설정

태백 한글 환경 설정

한맥 환경 설정

한맥 환경 설정


그러나 도스에서의 한글 입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몇몇 프로그램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의미가 없다. 그만큼 프로그램의 수준들이 높아졌고 컴퓨터가 영어권에서 주도한 기계이니 만큼 모든 명령어가 영문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한글 입력이 의미가 있는 곳은 오히려 윈도우즈이다.


의미 있게 윈도우즈3.1에서 세벌식 사용하기

윈도우즈3.1은 준운영체계이지만 윈도우즈의 자원을 윈도우즈용 어플리케이션들이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많은 각광을 받은 바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령 한글 자판의 경우 원도우즈가 이벌식과 세벌식 자판을 지원하면 윈도우즈에서 돌아가는 다른 프로그램들은 따로 자판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 없이 윈도우즈에 있는 그 부분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되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사람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프로그램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사용자는 어떤 프로그램을 쓰든지 동일한 형태의 사용 방법을 보장받기 때문에 혼돈을 피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윈도우즈의 표준을 따른다는 전제이고 이 표준이 매우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선언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세벌식 자판도 이런 의미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윈도우즈 3.1에서는 세벌식 자판을 지원하는데 이 표준을 따르는 모든 프로그램들은 자동적으로 세벌식을 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윈도우즈에서 세벌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도스에서도 지원하지 않던 세벌식을 MS가 윈도우즈에서 표준으로 지원하게 된 유명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한글 윈도우즈를 발표하기 전 MS에서는 최종적으로 세벌식 자판을 지원하지 않는 쪽으로 중지(?)가 모아지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참가했던 한 개발자는 어떻게든 세벌식을 윈도우즈의 표준으로 지원하고 싶어서 수를 쓴 것이 자신이 직접 윈도우즈용 세벌식 자판 드라이브를 만들어 통신에 다른 사람 아이디로 올렸다고 한다. 그런 다음 회의에서 외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부에서 이것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체면의 문제라고 강변했다. 그 덕에 결국 MS도 세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이다. 풍문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인지라 조금의 가감은 있을 것이나 기지가 뛰어난 한 개발자의 임기응변이 기분을 흐뭇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이다.


사족 : 표준의 중요성은 이래서 중요하다. 세벌식 자판이 윈도우에 한번 삽입된 이후 한글 윈도우는 지금까지도 두벌식, 세벌식 390 자판, 세벌식 최종 자판을 지원하고 있다. 한번 표준 안에 들어가면 별다른 이견이 없는 한 계속 지원하는 것이 세상의 관성이다. 무엇이든 처음 등제하는 것이 어렵다. 만일 그때 세벌식이 표준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세벌식 자판이 윈도우의 기본 표준에 들어가는 것은 난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윈도우즈에서 세벌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윈도우즈를 기동시킨 후 “기본프로그램”의 “제어판”을 선택한다. 제어판에서 “한글 입력 시스템”을 불러들인다.


기본 프로그램에서 제어판을 선택한 화면

기본 프로그램에서 제어판을 선택한 화면

제어판의 한글 입력 시스템

제어판의 한글 입력 시스템


한글 입력 시스템에서 “현재의 한글 입력 시스템”란이 아마도 “2벌식 한글/한자 변환 프로그램”으로 선택되어 있을 것이다. 세벌식으로 바꾸려면 그 아래의 “등록된 한글 입력 시스템”이 그림과 같이 보인다면 여기서 “3벌식[3-90자판]”을 선택한다.

만일 “등록된 한글 입력 시스템”에 2벌식만 등록되어 있고 3벌식을 볼 수가 없다면 “추가” 명령을 사용하여 새로 등록해 주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 “추가” 명령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한글 입력 시스템 추가”라는 대화상자가 뜨고 여기에서 “찾아보기” 단추를 선택해 “Windows 디렉터리 밑의 system” 방을 선택하면 대부분 세벌식 자판이 올라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윈도우즈 원본 디스켓을 삽입해 다시 등록해 주어야 한다.

자판을 “3벌식 [3-90 자판]”으로 선택하였다면 “설정” 단추를 마우스로 클릭해 “현재의 한글 입력 시스템”난이 세벌식 자판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고 종료하면 된다. 이것으로 윈도우즈에서의 한글 자판은 세벌식 자판으로 설정되었다.

참고로 윈도우즈에서 기본 지원하는 세벌식 자판에는 공자판이라는 것이 있다. 복모음과 특수기호의 위치가 많이 변경된 세벌식 최종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판이다. 그러나 390 자판이 대중적인 큰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세벌식이라고 하면 대부분 390자판을 일컫고 있다. 이 공자판은 주로 매킨토시 사용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사족 : 밑줄 그은 부분이 굳이 틀린 내용은 아니나 그 당시 세벌식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던 나의 인식의 한계에서 나온 모자란 정보라 할 수 있다.

3벌식[3-90자판] 자판은 박흥호 전 나모 인터랙티브 사장님이 공병우 박사님에게 허락을 받아 최종판인 공자판을 일부 변경하여 내놓은 것이다. 그것은 PC 쪽 세벌식 마니아들이 대부분 코더들이어서 코딩에 필요한 기호들이 한글 자판에도 있기를 염원했는데 그것을 반영한 것이 3벌식[3-90자판]이다. 이를 위해 공자판에 있던 종성 중 복자음 일부를 희생해 영문자판에 있는 부호들을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일부의 자판 배열도 바뀌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세벌식의 기본 원리를 충실히 따랐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세벌식으로 자판을 전환하는데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다른 한편으로는 세벌식 자판이 두 가지로 갈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악역이 된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한영 전환이 오늘날만큼 손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으니 그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였으리라 짐작해 볼 뿐이다.

세벌식 최종판은 처음에는 공자판으로 불리었으나 이후 세벌식 최종 자판으로 그 명칭이 통일되었다. 3벌식[3-90자판]에서 세벌식 최종 자판으로의 전환은 그리 어렵지 않다. 90% 이상의 자판 배열이 동일하고 자판이 가진 생각과 사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전환하는 데는 약간의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윈도우즈 95에서 세벌식 사용하기

시대의 흐름에 맞게 윈도우즈 95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요즘 컴퓨터를 새로 장만하신 분들이라면 컴퓨터에 기본으로 윈도우즈 95가 장착되어 있을 것이다.

윈도우즈 95에서는 윈도우즈 3.1 때의 관성이 남아 무난히 세벌식을 지원하고 있다. 윈도우즈 95에서 세벌식을 사용하려면 먼저 화면 하단에 있는 “시작” 단추를 눌러 “설정”을 선택하고 다시 “제어판”을 선택한다. 제어판 창이 열리면 “키보드”를 선택한다.


제어판에서 키보드를 선택한 화면

제어판에서 키보드를 선택한 화면

키보드 등록 정보 대화상자

키보드 등록 정보 대화상자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대화상자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대화상자


“키보드 등록 정보” 대화상자가 나타날 것이다. 대화상자 제목 아래 “속도”, “언어”, “일반”이라는 책갈피가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언어”를 선택하고 언어 책갈피가 열리면 화면 가운데 있는 “등록 정보”를 선택한다. “한글 입력 시스템 등록 정보” 창이 나타나면 세벌식을 선택할 수 있는 화면이 나온다.

자판을 선택하고 나서 확인 단추를 하나씩 누르고 다시 제어판으로 돌아오면 윈도우즈 95에서도 세벌식을 쓸 수가 있다. 세벌식 바로 밑에 있는 세벌식 최종은 앞에서 이야기한 공자판을 말하는 것이다.


매킨토시에서 세벌식 사용하기

매킨토시에서의 세벌식 설정 화면

매킨토시에서의 세벌식 설정 화면

매킨토시는 시스템 75에서의 세벌식 제공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매킨토시를 실행하고 나서 화면 상단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물음표 바로 옆에 단추가 하나 있을 것이다. 이 단추를 “참입력”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클릭하면 길게 풀다운 메뉴가 열리고 세벌식을 선택할 수 있는 화면이 나온다. 여기서 직접 세벌식을 선택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풀다운 메뉴의 “입력환경보기”를 선택하면 “파워 입력기”라는 대화상자가 하나 열리는데 여기서도 선택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필자가 매킨토시 솔루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료에게 그 방법을 도움 얻어 제공하는 것이다.


아래한글에서의 세벌식 사용

컴퓨터로 하는 일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워드프로세싱일 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글인데, 이 아래한글 워드프로세서는 운영체계의 입출력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HNC 라이브러리”라는 독자적인 입출력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입출력 체계 때문에 언어가 다른 세계 여러 나라의 도스와 윈도우즈 환경에 관계없이 아래한글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설명할 세벌식 관련 설명은 도스용 아래한글 2.1 이상, 윈도우즈용 3.0 이상의 버전을 중심으로 하였다.


도스용 아래한글

도스용 아래한글에서 세벌식을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아래한글을 실행시킨다.

한글이 실행되었다면 화면 왼쪽 아래를 유심히 살펴본다. “한글 3벌식” 또는 “한글 2벌식”과 같은 글자가 보일 것이다. 현재 본인이 쓰고 있는 자판을 의미한다. 왼쪽에 있는 Shift 키를 누른 상태에서 Space Bar 키를 눌러보자. 아마도 자판이 바뀌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글자판 배당 대화상자

글자판 배당 대화상자

글자판 배당 대화상자 하위 메뉴

글자판 배당 대화상자 하위 메뉴


세벌식으로 자신의 자판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Shift 키와 F2 키를 같이 누른다. “글자판 배당”이라는 대화상자가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맨 윗부분에 커서를 가져다 놓고 Tab 키를 누른다. 새로운 대화상자나 나타날 것이다. 다시 한글을 선택하고 세벌식을 선택한다. 두 번째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영어 미국을 선택한다.

아래한글에서 세벌식을 쓸 요량이면 될수록 이렇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래한글 2.5버전부터 영한 전환 기능이 새로 들어왔다. 자판을 한영으로 자주 전환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판이 변경된 줄로 모르고 엉뚱한 자판으로 글을 입력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때 Alt 키를 누르고 +키를 누르면 영어를 한글로 한글을 영어로 바꾸어 주는 좋은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은 사실 글자판 배당 대화상자의 맨 처음과 그 다음번 자판을 서로 치환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자판으로 지정해 놓고 한영전환 명령을 내리면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필자의 경우 가끔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 자판을 쓸 일이 생기는데 이때 한글과 그 나라 자판을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설정해 놓고 작업하는 경우 잘못된 자판으로 입력한 글을 신속하게 본래대로 바꾸어 주어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때가 많다.

또 이번에 아래한글 3.0 버전부터 도입돼 많은 호평을 들었던 한영 자동 전환의 경우 반드시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설정을 해야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수동으로 바꾸는 한영 전환은 영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자판에도 영향을 주지만 아래한글이 사용자의 명령 없이 알아서 자동으로 바꾸어 주는 한영 자동 전환은 위의 예를 벗어날 경우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동 한영 전환은 단순한 자판의 치환이 아니라 자연어처리라는 알고리즘을 거쳐 자료를 처리하는 일종의 인공지능이며 이때 자판의 설정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기능은 사용자가 입력 중에 실수한 오타나 잘못된 맞춤법 등을 자동으로 교정해 주는 빠른 교정과 함께 이미 특허출원을 해 놓은 고급 기능이다.

잠시 사설이 길었는데 ESC 키로 빠져 나오고 나서 왼쪽 Shift 키와 Space Bar 키를 동시에 눌러 주면 자신의 원하는 자판을 그때부터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또 한 가지 팁이 있다. 글자판 배당에서 위에서 3번째와 4번째에 지정된 자판은 오른쪽 Shift 키와 Space Bar 키에 의해 정의되는 자판이다. 즉, 3번째와 4번째 자판으로 지정된 자판은 언제든지 오른쪽 Shift 키와 Space Bar 키를 누름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한글에서 Shift 키와 Space Bar 키만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는 자판이 모두 4개가 되는 셈이다. 국어와 영어, 독어, 프랑스어, 일어, 히브리어 등을 공유해 쓰는 사람들의 경우 각각의 자판을 지정해 쓰면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 Shift 키와 Space Bar 키는 자동 영한 전환이나 영한 전환 명령과는 관계가 없음으로 앞에서 강조한 대로 이점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윈도우즈3.1과 95용 아래한글

윈도우즈용 아래한글은 영문 윈도우즈든 한글 윈도우즈든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어 윈도우즈나 중국어 윈도우즈에서도 매우 잘 돌아가고 한글의 입출력을 위해 사용자가 신경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윈도우즈의 기본 자판 현재 2벌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아래한글에서는 무난히 세벌식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윈도우즈용 아래한글 3.0b의 경우 윈도우즈 3.1이나 윈도우즈 95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용자들은 세벌식을 전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한 가지 방법만 익히면 된다.

먼저 윈도우즈 3.1이나 윈도우즈 95를 작동시킨다.

작동이 되었으면 한글이 저장된 그룹을 불러낸다. 대부분의 경우 “한글과컴퓨터”라는 그룹명일 것이다. 그룹 안에서 다시 “HNC 환경”이라는 파일을 선택한다. “HNC config” 대화상자가 열리면 “자판 지정”을 선택한다. 이제 드디어 자판을 선택할 수 있는 “자판설정” 대화상자가 등장한다.


한글과컴퓨터 그룹을 선택한 화면

한글과컴퓨터 그룹을 선택한 화면

HNC Config 대화상자

HNC Config 대화상자

자판 설정 화면

자판 설정 화면


이 부분부터는 혼돈하기 쉬우므로 설명을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먼저 글자판 바꾸기 바로 아래에 있는 단추를 선택한다. 단추를 선택하면 선택할 수 있는 언어별로 그룹이 나타난다. 한글을 선택하면 그 아래에 선택할 수 있는 세부 자판이 나타난다. 여기서 원하는 자판 즉 세벌식을 선택한다. 이 다음부터가 중요하다. 그런 다음 “왼쪽 shift + space 전환”이라고 되어 있는 박스 밑의 두 개의 단추 중에 첫 번째 단추를 누른다. 단추를 누르면 조금 전 선택된 세벌식이 입력된다. 즉 반드시 왼쪽에서 자판을 미리 지정한 다음 오른쪽의 단추를 선택해야 왼쪽에서 지정한 자판이 변경되는 것이다.

여기서 왼쪽, 오른쪽 1, 2라고 되어 있는 각 부분의 단추는 도스용에서 보았던 “글자판 배당 대화상자”의 맨 위 1번에서 4번까지를 의미하며 그 기능은 도스와 똑같으므로 한영자동 전환 등을 확실히 사용하려면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영문도 같은 방법으로 설정할 수 있다. 설정을 다 하였다면 반드시 “설정” 단추를 눌러 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도스에서처럼 ESC 키로 빠져나가 버리면 현재 설정한 자판은 지정되지 않게 될 것이다.


세벌식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

흔히 도서관이나 교보문고 등의 정보검색을 위한 단말기들에서 세벌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인 것 같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얼마 전 하이텔을 선전하기 위해 보급했던 하이텔 단말기의 경우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무상으로 기계를 빌려준다고 했지만 몹시 불편한데다 2벌식 전용이어서 차라리 모뎀을 사는데 났다고 생각했다. 조금 오래된 공공 기관의 단말기들은 거의 다 삼벌식을 사용할 수 없다. 조금 오래된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대다수의 프로그램들이 거의 다 세벌식을 지원하고 있고 지원하지 않는 프로그램들은 대처할 프로그램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세벌식 때문에 불편한 일은 별로 없다. 국립도서관에서 기계로 색인을 찾는 일은 프로그램 자체의 불편함으로 인해서 아예 포기한지가 오래고 교보문고에 가서 원하는 자료를 검색할 때는 그곳 아가씨에게 부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세벌식으로 살아가기

이상과 같이 많이 쓰이는 프로그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세벌식 사용방법을 대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윈도우즈만 사용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여기서 설명한 방법만으로도 세벌식에 대한 모든 고민은 끝날 수 있을 것이고 도스에서 많은 작업을 하는 독자라면 도스의 각 프로그램마다 세벌식을 쓰는 방법이 있으므로 이것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통신 프로그램인 이야기에서 세벌식을 쓰려면 ALT 키와 숫자 3번 키를 동시에 누르면 된다든가 하는 것은 각자가 익혀야 할 조그마한 몫이다.

아무쪼록 이 조그마한 기사가 내 컴퓨터를 좀 더 한국적이고 실용적인 세벌식으로 무장하게 하는 힘을 발휘하게 하고 또한 다른 이의 컴퓨터를 접하게 되었을 때에도 세벌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 없이 당당해 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끝으로 오길록, 최기선, 박세영 공저의 대영사에서 발행한 “한글 공학”이라는 책의 한글자판 부분에서 세벌식에 대한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세벌식 자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기계식 영문 타자기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적용시킨 비교적 능률적인 모아쓰기 한글 자판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벌식은 초성 자음과 종성 자음을 구별하여 별도의 자모를 자판에 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방식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가능하나 현재까지 실용화된 것은 공병우식뿐이다. …… 중략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타자 능률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은 글 입력 자모 수의 감소 효과이다. 이 점에서 IBM-390(3벌식)과 KSC-5715(2벌식)를 비교해 보면 세벌식이 우수한 것으로 판단된다. …… 중략 …… 전체적으로 보면 중성 자모의 출현 빈도 수가 종성 자모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중성 자모에서 유리한 세벌식 자판이 이벌식 자판보다 더 능률적인 자판이라 할 수 있다. 채택된 기본 자모수가 52개 대 33개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차이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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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


1995년 12월에 쓴 글이다. 벌써 10년도 넘은 글인 셈이다.

당시 필자는 (주)한글과컴퓨터 기술개발부문에 있었는데 당시 부서장이셨던 박순백 현 드림위즈 부사장님의 권유에 못이겨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도무지 짬이 안 나 글 쓰기 힘들다 했더니 업무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통에 기자와 약속을 하고 3회 정도 연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업무가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어서 짬내기가 힘들었다. 결과적으로는 필자의 글이 세상에 또 하나 나온 셈이니 박순백 부사장께는 감사할 일이다.  

다음 달인 1996년 1월에 Hello-PC 1월호에 실렸다. 반응이 좋아 다음달에는 세벌식을 배우고 활용하는 기사를 다시 실었다. 다행히 이 즈음에 자료를 백업 받은 것이 있어 원고가 살아남았다. 이전에도 많은 잡지에 글을 썼는데 모두 자료를 유실해 안타깝다.

당시 필자는 세벌식390 버전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세벌식 최종판을 사용하고 있다. 역시 대만족이며 새삼 공병우 박사님께 감사드린다.



먼저 밝힐 이야기

컴퓨터 업계에서 “우리 것”과 관련하여 늘 논란거리가 되는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두 가지는 코드와 자판에 대한 문제이다.

매우 복잡 미묘한 이 문제들은 언제나 논쟁거리를 제공하지만 실제로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시켜 보면 편차는 있으나 언제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코드는 조합형을, 자판은 세벌식을 미래지향적이고 한글 창제 원리에 맞는 것으로 귀착시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두 가지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판단이 여전히 대세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정권의 신선함을 풍기기 위한 무리한 조처로, 때로는 민간의 힘찬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부처의 이기주의로, 그리고 그 근간에는 새로운 표준으로 돈을 벌어 보려는 상업적 필요 등이 장애를 만들어 낸다.

오늘의 논의는 앞서의 모든 논쟁들을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단지 현재 쓰고 있는 세벌식 자판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필자가 왜 두벌식에서 세벌식으로 자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왜 공병우 박사님과 그가 만든 세벌식 자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세벌식 자판에 대한 조그마하지만 현실적인 소망에 대해, 필자는 아주 작고 정겨운 소리로 말하고 싶다는 것 외에는 이번 글쓰기에 큰 의미를 두려 하지 않는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며칠 전 회사의 전자게시판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글꼴 담당자의 글이었는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자막 서체로 공한체가 쓰였다는 것과, 영화의 내용도 좋지만 잠시 나오는 자막용 글꼴까지도 순수한 우리의 것을 사용하는 세심한 정성에 감동했다는 것, 그리고 글꼴이 예쁘니 기대하라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순간 필자는 마음속의 파문을 느끼면서 ‘그 영화만은 꼭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를 잘 아는 친구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반문했을 것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화보기를 서체 하나 때문에 보러 가겠다구?”

영문 OS/2에서 공한체를 띄운 화면

영문 OS/2에서 공한체를 띄운 화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글에 앞서 전자게시판에 등록된 글 중에는 공병우 박사님과 그분을 추종했던 한 분인 한재준 교수님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세벌체 글꼴 공한체를 아래한글에서도 쓸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의 말미에 “세벌식 자판과 세벌체인 이 글꼴이 어우러질 경우 영문 윈도우즈, 영문 OS/2, 영문 유닉스 상에서 다른 프로그램의 도움 없이 한글을 입력하고 출력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내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실제의 상황을 직접 체크해 보니 신기하게도 영문 OS/2에서 다른 프로그램의 도움 없이 공한체가 입출력되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놀랍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글 바이오스의 도움 없는 한글 입출력이라니……. 자리로 돌아오는 중에도 필자는 ‘도대체가’라는 말을 미친 사람 마냥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최초의 세벌식 사용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필자 역시 처음에는 두벌식으로 자판을 익혔다. 당시에는 두벌식 이외에는 다른 자판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필자가 만져 본 모든 자판에는 언제나 두벌식만이 각인 되어 있지 않았던가. 어느 정도 자판이 익숙해지자 필자도 두벌식 자판을 익혔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겪고야 마는 똑같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아래한글의 이벌식 자판

아래한글의 이벌식 자판

두벌식 자판으로 약 270타 정도 치기 시작하고 자판을 좀 더 많이 두드릴 필요성이 생기면서부터 조금만 길게 타자를 하면 손목이 아프고 손등이 조금씩 붇기 시작했다. 한 번은 자료를 준비하느라 10시간 정도 연속해서 타자를 했는데 그 다음날에는 숟가락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손목과 손등이 아파 왔다. 게다가 이런 일은 필자의 주위에 두벌식으로 타자하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였다. 나중에는 키보드를 더 이상 건드리는 것이 두려울 정도가 되었다. 타자를 조금만 하여도 부풀어 오른 손도 손이었지만 암벽 등반을 취미로 하는 필자에게는 이런 통증이 심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연히 잡지를 읽다가 운명처럼 인연을 맺은 것이 세벌식 자판이었다.

이전부터 풍문으로만 듣고 있던 세벌식에 대한 환상은 잡지를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그것은 다분히 세벌식 자판이 빠르다는 소문과 한글 창제 원리에 맞는다는 소문을 미리 듣고 있었던 때문이다. 특히 필자와 같은 증상이 세벌식 자판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어 어차피 컴퓨터로 일을 해야 할 바엔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학원 강사였던 필자는 수료생들의 수료 작품집을 거의 마무리해 놓았기 때문에 다음 번 정신없이 바쁜 강의까지는 약 1달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기에 자판을 바꾸겠다는 결심이 좀 더 용이했는지도 모르겠다.

타자 연습 프로그램을 가지고 무작정 열심히 세벌식 타자를 익혔다. 자판을 바꾸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답답함과 지루함은 마치 걸음마를 다시 배워야 하는 물리치료실의 환자와도 같은 것이다. 익숙한 두벌식 자판으로 치면 금방 끝낼 수 있는데, 더듬거리는 세벌식 자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필자는 거의 3개월이 지난 후에 드디어 자판을 완전히 바꾸는데 성공했다.


세벌식 사용자의 자랑스러움

아래한글의 세벌식 자판

아래한글의 세벌식 자판

세벌식으로 자판을 바꾸고 나서 가장 좋았던 건 부어오르던 손이 아무리 타자를 많이 해도 멀쩡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너무나 신기한 일 중 하나였다. “정말 좋았다.” 거기에 대한 단 한마디의 표현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 번 익히면 빠르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타자 역시 빠르게 예전의 타수를 되찾았다. 합리적인 자판 배열도 나를 기쁘게 한 것 중 하나이다. 매우 리드미컬하게 타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시간의 타자를 끝내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두벌식에 대한 어려움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금도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타자를 하다 보면 자음보다는 모음을 먼저 친다. 두벌식 자판은 왼쪽에 자음이 몰려 있지만 세벌식 자판은 왼쪽에 중성과 종성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오타는 처음 익혔던 자판에 대한 버릇에서 나온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필자는 세벌식 자판에 아주 만족한다. 민족적인 정서와 한글 창제 원리에 맞는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실용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노트북 컴퓨터를 자주 쓰는 요즘에 들어서는 더욱 세벌식 자판에 애착을 느낀다. 세벌식 자판은 노트북의 작은 자판으로도 무리 없이 손을 놀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노트북 때문에 결국 두벌식에서 세벌식 자판으로 전환한 친구가 있을 정도다. 숫자 키패드가 없는 노트북 자판에서 숫자 키패드를 닮은 세벌식 자판의 고유한 숫자 배열 역시 금상첨화이다.


단 한번 먼발치에서 본, 그분

필자는 작년에 공병우 박사님을 한 강연에 참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분을 뵈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매우 늙어 있었고(기억이 맞는다면 90세가 된) 육체는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연을 하는 중에 말을 더듬었고,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옆에서 질문의 요지를 알려 주어야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물을 엎지르거나 허리 버클이 풀려 있어도 그것을 스스로 챙기지 못했다. 세벌식 자판과 세벌체 글꼴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한다는 강경한 강연 내용의 일부는 공감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매우 바빴음에도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억지로 시간을 만들었던 필자는 단숨에 그를 존경하고야 말았다. 그에게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열정이 있었고, 한글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긴 세월을 헌신해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강건함이 배어 있었다.

강연의 끝 무렵이었다. 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듯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세벌식이 왜 정부의 공식적인 표준으로 자리하지 못하는가? 모든 사람이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열은 분명한데. 왜? 외압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표현할 수 없는, 숨겨야만 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인가?” 필자가 느끼기에 그 중년의 여자는 아마도 너무나 우수하면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세벌식에 대한 답답함을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늙어 버린 육체를 끌고 온 공병우 박사님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고 엉뚱한 대답만을 했었다. 그것마저도 모인 모든 이의 마음을 뜨겁게 했고, 그의 육체가 싱싱하지 못한 것에 대해 모두가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강연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평생을 한글 과학화에 몸 바친 한 사람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치는 것으로 존경을 표시하며 끝을 맺었다. 그때 필자는 세벌식 자판을 칠 준 안다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감격했다. 소문만으로 접했던 그를 실제로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흡족했다. 그리고 올해 초 슬픈 소식을 들었다. 철이 들어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던 필자도 눈물을 떨굴 뻔 했다.

그의 죽음. 세상을 뜬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그의 죽음. 내 가슴을 난도질하듯 비수로 박혀 온 저미도록 비장한 그의 유언. 굴곡된 역사를 가진 이 땅에, 마땅히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던 이 시대를 뒤로 하고 그는 그렇게 힘찼던 한 생을 마감했다. 필자는 그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벌식 타자 연습만으로 그에 대해 마지막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알기로 그날 그 강연이 공병우 박사님의 마지막 강연이 되었다.


씁쓸했던 한글 윈도우 95 발표회장

얼마 전 한글 윈도우 95 발표회장에 갔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한글 윈도우 95는 미완의 미봉인 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행사장 중앙 바로 뒤켠에 마이크로프레스 부스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컴퓨터 잡지 중견 기자와 한국MS사의 고위직 임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의 입장에서는 취재였고, MS사 관계자의 입장에서는 설득이오, 강변이었다. 그것은 한참 문제가 된 통합형 코드가 뭐가 나쁘냐는 노골적인 이야기였는데, 요지는 ‘세종대왕이 나라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한글을 우리나라 백성들이 아무 불편 없이 편하게 잘 쓰면 되는 것이지 사용자들이야 그 내부가 어떻든 상관없지 않느냐.’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왜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고 입맛이 씁쓸해 지는 것인지. 평생을 몸 바쳐 겨레의 말과 글의 과학화에 온 정열과 사랑을 불살랐던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몇 억의 행사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한글만 나오면 됐지.’ 하고 당당해 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나는 이 신문사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한겨레신문의 한 기자가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몇몇의 신문사와 새로 창간되는 시사 주간지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곧잘 받던 중견 기자였다. “…… 재벌을 위해 일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여기가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박봉이라 떠나가는 동료들을 이해한다는 그. 높은 액수의 봉급마저 거절할 수 있는 그의 정신.

그 기자를 생각하면서, 수없이 주체성을 이야기하고 주인 정신을 토로하던 이 땅 한가운데서 발견한 또 다른 우리 모습에 씁쓸함을 남기던 행사장이었다.


세벌식에 대한 몇 가지 의견

세벌식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초·중·종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입력도 초·중·종성 3벌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글을 수정할 때 이를 이용한다면 재미있는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먼저 “”자를 치려고 했는데 “”으로 입력한 것을 나중에 발견했을 때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자를 지우고 다시 “”자를 입력해야 한다. 이때 세벌식 자판이라면 커서를 “”자에 위치시키고 종성인 “”을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자로 수정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로 수정하고 싶다면 중성 “”를, “”자로 수정하고 싶다면 초성 “”을 단지 입력만 하면 된다. 초성과 종성을 구별할 수 없는 두벌식은 불가능하겠지만 한글창제 원리에 맞게 세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세벌식은 가능하다. 구현만 된다면 글을 수정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글의 특징을 전산화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할 뿐더러 세벌식 자판을 더욱 자랑하고 인구를 늘리는 조그마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중적인 워드프로서세에서 가능하다면 더욱더 그러하리라.

필자가 한 동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것은 이미 “깃든글”이라는 한글 바이오스에서 구현된 바 있다며 시연까지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제까지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고민하던 문제가 의외로 손쉽게 여러 프로그램에서 구현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 아닐까?

또 하나 의견이 있다. 그것은 글을 입력하다 보면 자주 쓰이게 되는 음가 없는 “(이응)”과 관련된다. 가령 “이것은”이라는 말을 보면 “”와 “”은 “(이응)” 자체에 음가가 없는 말이다. 즉 “”와 “”가 오기 위한 자음 - 이런 경우 무어라고 표현하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이다. 두벌식이라면 완전한 조합이 끝나야만 초성과 종성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세벌식은 음가 없는 초성 “(이응)”의 구분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 “(이응)”을 치지 않고 단지 모음을 입력하는 것으로 자동으로 음가 없는 초성인 “(이응)”이 입력된다면 타자하는 시간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글에서 음가 없이 초성에 쓰이는, “(이응)”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조그만 소품들이 우리 글 창제 원리에 너무나도 적합하게 만들어진 세벌식 자판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재가 되리라 생각해 본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모든 분들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끝나지 않은 전태일의 이야기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생각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난 어제는 출근하는 길에 문득 극장 앞을 지나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간판을 보았다. 바쁘기도 했지만 ‘문화생활도 습관인 것’이라며 애꿎은 푸념만 늘어놓았다. 출근을 해서 새로운 소식을 찾아보려다 지난번의 영화와 공한체 그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처음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세벌식 자판과 삼벌체가 어울릴 때 자연스러운 입출력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 지는가에 대한……. 아마도 무협지라면 그 이유에 대해 경악했다고 표현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한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한글 과학화의 시작은 타자기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타자기에 집착을 많이 가지셨던 공병우 박사님다운 견해였다.

원리는 너무나 간단하다. 공한체는 타자기의 자판처럼 모든 글자가 거기에 맞는 적당한 높이와 위치를 가지고 3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벌식 자판으로 이 서체를 입력하면 타자기의 활자가 종이에 옮겨지듯 자연스럽게 글자가 조합되고, 입력되며, 출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영문 서체처럼 단지 24개의 초성, 중성, 종성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11,172자의 모든 한글을 어떤 시스템에서도 쓸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왜 공병우 박사님이 세벌식 자판과 삼벌체를 그렇게 주장하셨는지 그제야 비로소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려운 자동차 망국론

아침 출근길도 마찬가지였지만 자동차가 급격히 늘어나고 교통체증이 심각해지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던 말이 자동차 망국론이다. 거리에서 뿌리는 시간과 기름을 돈으로 환산하자니 대책이 안 선다는 것인데, 그 말을 생각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공병우 박사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다른 것은 다 접어 두고라도 필자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두벌식 자판을 사용하며 겪었던 일들이 문제이다.

무리하게도 한 손에 많은 자판을 배당함으로 해서 얻게 되는 통증. 도깨비불 현상 때문에 글자가 화면에서 조합되는 동안 오타를 치고 있는지 정타를 치고 있는지 걱정이 앞서던 심리적인 불안감. 자판 배열의 불합리성 때문에 리듬감 있는 타자를 하지 못하고, 불규칙한 리듬으로 입력행위가 이루어지다 보니 신체의 균형적인 리듬마저 깨져 버림. 그리고 세벌식 자판을 알게 되면서 잘못된 물건에 거금을 치른 것 같은 속상함 등을 돈으로 환산하면 그것은 얼마나 되려는지…….

공한체를 대하며 오늘날 우리가 대중적으로 세벌식 자판과 세벌체 글꼴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면 컴퓨터를 쓰면서 우리 것과 관련하여 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코드와 자판의 문제 절반은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현실이라는 벽

요즘 주위에서 갑자기 컴퓨터에 입문하는 선배들이 많아져 필자가 조금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선배는 이제야 286 컴퓨터를 한 대 구해서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글을 많이 쓰기에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고품질을 요구하는 워드프로세싱이 아니라면 286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아직 타자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선배에게 타자 교습 프로그램을 선물하고 나서 결국 가르쳐 준 자판이 두벌식이 되고 말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자판도 문제였지만 그 선배가 워낙 초보자라서 다른 프로그램에서 세벌식 자판 전환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dir도 모르는 선배에게 세벌식 자판을 가르치기란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결국 선배가 나중에 더 나은 자판을 원하게 된다면 필자와 똑같은 아픔을 가질 것을 강요하고 만 셈이다.

같은 세벌식을 쓰는 한 동료의 말이 기억난다. 자신도 부모님과 동생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면서 결국 같은 이유로 부모님께는 두벌식을, 동생에게는 세벌식을 가르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두벌식과 완성형 코드가 5공 비리의 산물임을 주장하는 그 친구의 말에 필자는 결국 동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세벌식의 우수성이 아니라 두벌식의 지배성이다. 결국 세벌식은 마니아들의 충족물일 뿐 찬밥신세가 되지 않겠느냐?”는 그의 푸념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

자조는 새로운 희망을 향한 줄달음이다. 그렇다. 오늘 이런 긴 글쓰기의 주제를 세벌식 자판이라는 소재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세벌식을 통해 우리 것에 대한 기쁘고,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수많은 희망을 언급하고 싶은 것이며, 결국 새로운 희망으로 나서기 위한 열정을 표현하려는 것 아닌가! 누군가의 말처럼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단 말인가.’ 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고 이 땅의 공기와 물을 마시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더 우리답고 더 나다운 삶을 향한 조용한 몸짓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전태일처럼 자신을 불사르는 열정까지는 선택할 수 없다 하더라도…….

희망이란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그 작은 것이 모여 분신하는 거대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에 앞으로 만나는 어떤 사람들 중에는 분명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세벌식을 쓰시네요! 세벌식 자판이 정말 빠르긴 빠르죠?”

이것. 많은 사람들의 작은 희망들 속에 분명 살아 있는 우리다운 것에 대해 작은 열정들…….


글을 마치며

생각 같아서는 글 말미에 “우리 모두 한글 창제 원리에 맞고 실용적인 세벌식을 씁시다!”라고 쓰고 싶었다. 차마 그 말로 이 글을 맺지 못하지만 자판 하나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이 지금 자판을 새로 익히거나 혹시 바꾸어 볼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체험담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저녁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만나기 위해 기필코 시간을 내어야 겠다. 그 어느 날 공병우 박사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억지로 짬을 만들어 달려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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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