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를 구독하다.

조중동 폐간

집 문 앞에 붙여 놓은 조중동 폐간 촛불 소녀.

얼마 전의 일이다. 거래처를 방문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아리따운 아가씨의 목소리가 흘러 든다. 차분하고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상냥한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류다. 그런데 그 아리따운 목소리에서 흘러 나온 내용인 즉 고교동창회와 연관되어 모 신문사의 문화 센터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가입하겠냐는 안내였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동창회를 빙자해 또 누군가가 개인 정보를 팔아 치웠나? 아니면 저쪽에서 이름을 파는 건가? 슬며시 화가 났지만 천진한 목소리를 굳이 방해하기 싫어서 "지금 운전 중인데요. 다음에 하시죠." 했다. 그랬더니 상대방은 내가 관심을 보이는 줄 알고 "그럼 몇 시에 다시 걸면 좋으실까요?" 한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눈치 없는 아가씨는 그것이 점잖은 거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면 구태여 모른 척 수작을 부리거나. 이럴 땐 단도직입적으로 하지만 굳이 상대방을 긁을 필요 없는 단호함이 필요할 때. "기분 나쁘게 듣진 말아요. 실은 나 조중동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상대방도 눈치를 차렸는지 "아! 네." 한다.

사실 상대방에게는 탓을 하고 싶지 않다. 목소리만으로는 기분 좋은 상대. 하지만 그를 고용한 자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날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게 다다.


"조중동"이라. 우리나라를 쥐고 흔드는 대표적 언론(?)이다. "언론"이라는 이름만 빌리자면 논할 자격이 없으나 강력한 시장 지배력으로 여론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을 슬프게 한다.

나의 아버님이나 장인 어른과 대화를 할라치면 똑같은 사안인데도 그 벽을 넘을 수 없게 장벽을 만들 자들. 세상을 자신들 마음 데로 재단할 수 있다는 오기와 신념을 가진 집단 정도. 하지만 그 목표는 자신들의 권력 사유화와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세상 만들기 정도일 뿐 여론이라는 것을 통해 시류의 균형을 잡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꿈은 없다.


그러니 집사람이나 나는 "조중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실 피가 끓는다.

비록 한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아줌마, 아저씨가 다 되었지만 아직도 사회를 향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20대의 혈기가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용솟음 치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시류에 따라 주장하던 논조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철면피를 가진 "조중동"이란 이름은 단지 권력을 향한 집념을 위해 오직 자신들에 의한 유토피아 만을 꿈꾸는 그들만의 찌라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미친소 플랜카드

동네에서 나만 건 줄 알았는데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참 많이 보인다. 다들 같은 마음이랄까...

촛불들이 더 높아질수록 사회에 대한 의무감은 더 고양되고 말 바꾸기에 신념마저 저버리고 지조조차 없는 조중동에 대한 공분은 높아진다. 그래서일까? 과천에서 미친소 플랜카드를 걸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구해 집에 걸었다. 집 앞 도로로 나와 집에 걸린 플랜카드를 보며 지나왔던 많은 삶의 순간마다 침묵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이제야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했다. 집사람과 두 손을 꼭 잡고 먹고 사는 일에 바빠 그 동안 미루었던 일들을 이제야 해 치운 양 기뻐했다. 그걸 보던 아들도 "와 우리 집에 깃발이 걸렸어" 하며 폴짝폴짝 뛰자 절로 마음이 우쭐해졌다. 역사적인 순간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 기록을 남겨 후에라도 그 순간 본인도 그 자리에 있었음을 뿌듯하게 해 주고 싶어서 그 긴 전경 버스의 장벽 앞에서 한 방 찍고 아들과 함께 "고시철회, 재협상하라", "조중동 폐간" "2MB OUT"을 소리 높여 불렀고 우리 집 대문 앞에도 촛불 소녀의 "조중동" 폐간 스티커를 붙였다. 동네 이웃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도 함께 가 비폭력 문화제를 마음껏 즐긴 즐거운 한때였다.


배달 온 조선일보

아침마다 조선일보가 배달온다. 누가 볼까 얼른 치운다. 참 거시기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요즘 우리 집은 조선 일보를 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구독 중이다.

"아. 정말 거시기하다."

빨간색 조중동 폐간 스티커 아래 매일매일 조선일보가 쌓인다. 그렇다고 조선일보가 대접받는 것도 아니다. 새벽이면 누가 볼까 얼른 집안으로 들였다가 재활용을 버리는 날만 되면 그날로 폐지 신세다. 굳이 얼굴을 돌려 읽지는 않는다. 마지막 자존심이라 해야 할까.


사연인즉 이렇다. 집사람이 다니는 회사는 제법 이름 있는 출판사다. 이름 있다는 것과 명망 있다는 것은 늘 통하지는 않는 법. 한편으로는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나 보다 싶고 한편으로는 지조도 없다 싶으나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조선일보 일년 구독료를 내 주고 보게 만든 것이다.

이유인 즉 광고에서 유리한 조건을 받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잡다한 이유도 끼었을 것이다.


사실 출판사는 신문 광고에 목맨다. 요즘 시대에 신문을 누가 읽나 싶겠지만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다. 소위 셀러가 되면 판매의 지대한 영향을 받기에 사재기를 해서라도 셀러에 일단 진입시켜 놓으려는 것이 출판사의 생리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의 하나라고 할까.

문제는 그 셀러가 대부분 교보문고를 중심으로 한 오프라인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온라인은 셀러보다는 오히려 노출 빈도수가 판매에 더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일간지에 매주 나오는 셀러의 순위는 대단한 공신력과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럼 신문 광고가 이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출판사의 신문 광고는 소위 독자를 위해 광고하지 않는다. 바로 서점을 위해 광고한다. 광고가 나간 날 서점 매대에는 책이 더 잘 보이게 올라간다. 아침 신문의 광고란을 보고 가판을 정리하는 것은 서점들의 오랜 관행이다. 그 때문에 영업자들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 서점을 돌며 일명 "설레 발이"를 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셀러에 영향을 미친다. 독자가 광고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면 금상첨화다. 게다가 광고를 하는 책은 서평 하나라도 더 써주고 토씨 하나라도 우호적인 것이 신문사다. 그러니 출판사들이 신문사의 광고에 목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그 출판사와 조선 일보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얽히고 설켜 그런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마케팅 차원에서 부수 늘리기가 동원되었고 우리 집 역시 그의 포로가 되었다.


이럴 땐 참 거절하기가 난감해 진다.

뜻하지 않게 관계사의 제품을 판매해달라고 할당이 들어올 때. 거래 은행을 옮긴다며 통장과 카드를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할 때. 그런 모든 일들처럼 그 회사에 매여 있는 한 거절하기 힘든 일들.

그래 본다고 치자. 그 흔한 경품은 어디로 갔을까. 받은 바 없다. 기본이 6개월 공짜인데 그건 어떤가. 첫 달부터 돈 낸다. 단 회사가 지불해 준다. 아! 받은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매달 유아용 학습자 하나가 온다. 포장도 안된 달랑 잡지책 한 권 분량의 책이다. 유명 브랜드의 책이나 조선일보 자가 선명하게 찍혀있다. 경품이라면 경품이랄까. 관행 데로라면 저질 제품을 최고가에 산 셈이다.


그 모든 것을 접하고 나니 참 답답하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이 깊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래처럼 해 볼까?

첫째 집사람 회사에 전화를 해서 이 일과 관련해 한판 붙는다. -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자신의 일에 애착을 가지며 꾸준히 성장해 가는 아내에게 그것만큼 못할 짓이 없다. 직장 생활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그 결말이 어떨지는 능히 짐작이 간다.

둘째 배달하는 아이를 기다려 돈은 일년간 줄 테니 굳이 여기는 넣을 필요 없다고 겁을 준다. 당장 시야에서 사라지니 좋기는 하나 절독 등으로 발행부수에 타격을 주자는 것에는 상통하지 못한다.

셋째 일단 구독 정지를 한다. 집사람 회사에서 말이 나오겠지만 그 다음은 나중에 생각한다.


"고민 중. 고민 중."


촛불 든 산이

먼 훗날 이 아이도 이곳에서 구호를 외친 민초들의 뜻과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미래는 이 아이의 것임으로... 엄마와 아빠가 온 이유다.

전경 버스의 장막 앞에서

역사의 순간에 있었음을 알리는 증거 사진. 그러나 가져간 사진기는 능력이 부족하여 선명하게 찍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장비 욕심이 난다.

촛불집회 간 동네 사람들

함께 갔던 동네 아이들. 금요일 저녁 모처럼 한가한 시간. 동네 사람들과 비폭력 문화제를 여한없이 즐기다 왔다.


살다 보면 참 난감한 경우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무리 개똥 철학이라도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조그마한 신념은 있다. 좌충우돌 하는 아이에게도 넘어서는 안 되는 룰이 있듯이, 나에게도 사회를 바라보는 최소한의 이념이 있고, 사회적 책임을 가진 언론사 역시 그에 합당한 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그러질 때 사회를 기반하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 그 때문에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우리 집"은 뜻하지 않는 부침에 힘겹다.


"조선" 그리고 "조중동". 헉 너희들은 정말 우리 스타일이 아니란다.

천심인 민심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천심인 민심의 기대에 부흥해 주고, 천심인 민심의 간절함이 표현되어 질 때 그때 비로소 그대들의 가치가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 것. 허나 지금은 그대들이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또한 스스로의 성찰에 눈 감고 있으니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며 그대들이 소멸해야 할 이유다.


아마도 빠른 시기 안에 우리 집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조선"이라는 찌라시 마물은 곧 절독될 것이다. 기왕 터진 일 부수 줄이기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을 차라리 자랑 삼으리라 위안해 본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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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


선택에 관한 간단한 단상

대략난감

글을 쓰면서 난감한 것은 이런류의 글이 결정론의 신봉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선택이란 때로 선택적이지만 대부분은 맹목적이다.
선택은 애초부터 가치에 대한 수용자의 한계선을 정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어떤 선택은 수용자에 의해 버려지며, 어떤 선택은 취하지 못해 아쉬워하거나 더 큰 슬픔을 주기도 한다. 선택선택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용자는 선택이 수용될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의 넓이를 가져야 한다. 최상의 선택은 수용자가 수용 가능한 넓이를 가진 - 딱 들어맞는 가치를 얻었을 때이다. 버릴 수 있는 선택마저도 버릴 수 있는 넓이를 가지지 못하면 삶의 무게가 되어 수용자는 흔들린다. 딱 들어맞는 가치는 수용자의 넓이를 더욱 넓게 만드는 자가 발전의 형태로 성장한다.


선택이 맹목적이 된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수용의 한계를 넘는데 집착해 왔고, 가치를 채우는 일에 목말라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한 분야,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인간 스스로 일등의 가치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사회적 인간에게 주어진 제일의 목표이자 숙명으로 강요된다.


일등의 가치로 올라서기 위해 매워야 하는 자신의 빈자리들은 언제나 선택으로 채워진다. 뛰어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인간은 최상위의 목표를 위해, 스스로 한계를 만든 인간은 그 한계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무언가를 결단하며 선택한다.


선택의 욕구는 소유를 수반하며 권리를 한정한다. 한정이란 뚜렷한 경계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소유의 수반과 권리의 한정이 선택으로 규정될 때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택은 욕망의 일환이다. 욕망은 한계의 굴레를 넓히는 도구이며, 욕망의 표현은 선택이다.


수용의 한계선이라는 외줄 위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인생이고 보면 벌린 양손의 균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선택이란 그 무엇도 가능하나 그 무게만큼은 일정하지 않다. 욕망의 강렬함이 선택으로 함몰될 때 목표는 상실되고 균형은 무너진다. 최상의 목표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최상의 선택을 향한 욕망은 불같고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유혹의 긴 계단을 오르기를 요구한다. 최고의 꼭짓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쳐야만 하는 운명의 유혹이 있고, 또한 이겨내야 할 도전들이 기다린다. 아무 의미 없이 날뛰는 것 같은 야생마도 자신이 가야 할 길과 그렇지 않을 길을 구분한다. 다만 그 길의 끝을 모를 뿐이다.


무엇이 되었건 최고의 꼭짓점에 있는 선택은 유혹의 긴 계단을 오르고 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다. 선택이 갈림길이 되었을 때 지표가 되는 것은 신념과 인내와 투지다.
목표하는 바가 있는가?
목표가 신념이 되면 모든 삶이 그것을 향하게 된다. 머나먼 그 길을 그것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은 인내다. 인내는 투지가 뒷받침될 때 성장하며 활기를 얻는다. 투지가 솟구치는 비법은 열렬한 신념을 갖는 것이다. 선택은 신념의 결과이며, 선택의 쟁취는 인내를 통해 자기 가치를 선택의 폭만큼 넓혔을 때 가능하다. 투지는 선택이 안착되도록 땅을 가꾸는 동력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의 한발을 내딛게 만드는 신념이 사람을 향해 있었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선택과 손잡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희망이 되는 선택으로 신념이 길을 인도하고 의지가 그 힘이 되며 투지가 그 길을 열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욕망이 들끓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굴레 안에 갇혀 서로가 서로를 밝고 일어서서 오로지 한 꼭짓점을 향해 치를 떨며 가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의 그늘에 한 줄기 햇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꿈같은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선택은 예측될 뿐 미래의 끝은 알 수 없다. 기왕 알 수 없는 끝이라면 유혹에 현혹되고도 운 좋게 성공하는 이들보다 조금 힘들더라도 밝은 세상 (지배하는 것이 아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선택이 내가 가야 할 길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요약하면,
인생을 살아가며 수만 번 해야 하는 선택은 돌아보면 삶이 살아 온 지표다. 선택이란 삶에 대한 오늘의 가치관이며 대부분 미래의 삶에 대한 결과로 다가온다. 인간은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며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그 세상을 형성한다. 기왕에 그 세상이 밝고 아름답기를 염원한다면 모든 개개인의 작은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족 : 얼마 전 다시 탈고한 소설 보물은 자신의 삶이 처한 현실을 만년필옥반지라는 소재를 통해 선택의 가치와 그로 인해 삶이 전환되는 세태를 진지한 어조로 그려본 것이다. 선택의 순간 기왕 한 발을 내딛을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을 향한 밝은 신념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삶이 성장하고, 그 성장이 세상을 향한 맑은 공기가 되면 세상사람 모두 가슴 한 구석에 꿈꾸듯 가지고 있는 이상향을 실현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염원을 담기 위해 노력한 글이다. 선택이라는 용어를 쓰다 보니 문득 다시 소설 보물이 생각난다.



이 글이 쓰인 메모를 보니 2006.2.15이라고 쓰여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시기는 나 자신도 회사도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당시 몸 담았던 싸이버뱅크는 매우 힘들었다. 국내 PDA 폰 시장의 1위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대기업의 시장 진출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사내 개발 스케줄도 고무줄 같았다. 비전과 리더십의 부제로 인한 총제적인 난국이었다. 회사의 기획부서 팀장 자리를 꿰차고 있던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근본적인 대안은 있었으나 난마처럼 얽힌 기업내부의 사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는 계속되어 나에게도 연락이 온 터라 생각이 뒤숭숭했다.

아마도 그때 선택이라는 말이 참 가슴을 아리게 했던가 보다. 게다가 그날 회사의 중요한 파트너에게 내가 차지하고 있는 직책과 업무의 체계 때문에 원하지 않는 메일을 보내야만 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매우 현명하지 않은 결정에 의한 것이었고 앞날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총대를 멨다. 조직에 몸담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런 울컥한 상황이니 시인詩人을 자처하는 자가 낙서에서 시작해 결국 이런 글을 낸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의반타의반 결국 회사를 퇴사했다. 그 동안에도 나는 회사를 이직하지 않았다. 몇 해를 함께 한 동료들에 대한 의리와 회사의 간부로서 어려울 때일수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룬 것은 없었다. 그저 빈손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남았던 그 결정은 현명한 일이었을까 자문해 본다. 결과적으로는 아니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거의 1년을 쉬었다. 그 동안 나는 아들 산이와 정서적인 공감대를 높일 수 있었고 한권의 책을 집필했다. 아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높인 것은 이 시기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며 성과였다. 필집한 원고 역시 거의 마무리되어 원하는 방향으로의 출간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선택들이 나에게 과연 어떤 길을 열게 할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인내가 내 길을 열게 하고 투지가 그것을 뒷받침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한 나의 신념이 결국 또 다른 내 길을 밝은 빛으로 인도해 나갈 것이라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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