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각자의 삶이나 자신의 관심사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자리라고 할까? 차례가 되어 나도 쓰게 되었다.
1편은 그해 있었던 머리를 기르며 느꼈던 생각의 단편이다.
머리를 기르다.
요즘 나는 머리를 기르고 있다.
머리를 기르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일까 하지만 나이 사십이 넘은 남자가 유교적 사고와 직장인으로서의 사회적 규범에 제약을 받는 상태에서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다행이 내 직장은 소위 IT 기업이라 비교적 복장이나 두발 등이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위 한국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규율과 눈들이 존재하다보니 나 자신도 항시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는 경우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생각해 보면 독재와 자유의 시대를 거쳐 온 표준적인 한국 남자가 귀를 거의 가리고 목을 반쯤 덮을 정도로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참 상상하기 힘든 돌출 행동일 것이다. 초중학교 시대에는 그야말로 권위적인 시대라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한 행동처럼 제약을 받았다. 그리고 전두환 시대에 비로소 학생들의 두발 자유화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쇼였고 두발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에도 학생부 선생들은 여전히 바리캉을 들고 다녔다. 조금만 머리가 길어도 머리 한 가운데로 길을 내는 것이 별 흉이 되지 않던 시대를 살았다. 대학 때는 자유로움 보다는 엄격함에 지배당했고 머리를 빡빡 깎고 군대를 다녀왔다. 그리고 이어진 직장 생활은 대부분 스포츠보다는 약간 긴 머리를 하고 다녔다. 한때 회사를 운영할 때에는 머리에 대해 더 엄격했다.
머리를 길렀다면 아마도 잘 생각나지 않는 초등학교쯤이었을 것이다. 사진들을 보면 귀를 덮을 만큼 길렀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의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의지에 따라 머리를 기른 적이 단 한번 있었는데 20대의 혈기 방자한 한글과컴퓨터 재직 시절이었다. 그때는 무어랄까 가슴에 품은 꿈이 컸는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과 나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당한 방법이 없는지 고민을 하던 차에 외적 방법의 하나로 머리를 길렀다. 당시 나의 카운슬러였던 윤순이 누나에게 조언을 구했고, 처음으로 미장원이라는 곳을 따라 같다. 그것도 이대 부근의 미장원이었는데 그곳 언니(?, 오늘날에는 스타일리스트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때에는 그저 언니라는 호칭으로 통했던 것 같다.)의 조언의 받아 귀 쪽은 스포츠머리처럼 치고 뒷머리를 기르는 형태로 머리를 길렀다. 당시의 유행한 머리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머리가 맥가이버 시리즈 중에 맥가이버가 한 머리의 형태 중 하나와 비슷했다. 아무튼 한 사람의 머리를 다듬기 위해 한명의 언니와 여러 사람의 보조들이 붙어 서비스하는 행위를 처음 겪어 본지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의도는 매우 훌륭했고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과정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머리를 언제까지 유지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귀를 덮지 않는 형태의 긴 머리라 심리적으로 머리를 길렀다는 의식이 희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 후 어떤 계기로 생활 한복을 입게 되었는데 이것이 머리를 기르고자 했던 의식과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후로는 머리를 기른 기억이 없다. 이상하게도 나를 대했던 여러 사람들이 생활 한복이 내 이미지와도 잘 맞는다고 하는 칭찬에 힘입기도 했지만 입어 보니 편하고 마음도 편안해지는 느낌이라 이후 생활 한복 마니아가 되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양복보다 생활 한복이 더 많다. 그런데 생활 한복이라는 것이 보통의 옷보다 더 시선이 많이 가는 옷이라 머리까지 장발이면 시선을 더 견딜 수 없다 판단했는지 생활 한복을 입으면서 머리가 조신해 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그 이후 장발에 대한 기억은 끊겼다.
20대의 긴 머리 사건 이후로는 스포츠머리이거나 그보다는 조금 긴 머리를 오랜 기간 고수해 왔다. 이른바 바른생활 머리다. 유지 관리도 편하고 이런 머리는 5,000원하는 규격화된 브랜드 머리점에서 쉽게 깎을 수 있는 스타일이라 접근이 쉬웠다.
사실 나는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느낌이 참 좋다.
머리가 바람에 날리면 산발이 되는데도 바람을 받으며 머리가 펄럭이듯 날리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쾌감을 얻는다. 마치 나도 날리고 있다는 느낌, 하늘하늘 거린다는 느낌, 붕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과, 지상의 발이 지면에 붙어 있기 위해 긴장하는 약간의 저항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 등의 느낌이 가슴에 새겨진다. 그런 느낌들이 가슴에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며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처음 느낀 것은 어느 날 밤의 인수봉 위에서였다. 20대의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는 나에게 참 불안하고 힘겨운 삶이었다. 삶이 한번 바뀌었고, 바뀐 삶 역시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 때는 일하다 말고 구두에 정장 차림으로 원효 리찌를 타고 백운대에 자주 올랐다. 젊은 시절 몸담았던 한글과컴퓨터의 근무 환경이 좋았던 탓도 있었다. 1주에 44시간 하루 4시간 이상만 근무하면 되는,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근무 조건에서 일하다 보니 일이 막히거나 삶이라는 과중한 형이상학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컴퓨터를 로그아웃(로그아웃을 하면 근무시간 산정이 안 된다. 그래도 게으른 것은 아니어서 항상 70시간 넘는 주간 근무 기록을 남겼다.)하고 열기를 식히기 위해 무작정 산을 오르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으로도 마음의 화를 참지 못한, 부글부글 가슴 끊는 밤이면 배낭을 메고 야간 암벽 등반에 나섰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식혀야 삶이 살아나는 것이다. 다잡지 못하고 풀어져 버리면 그땐 속수무책이 될지도 몰랐다. 항시 책상 밑에는 암벽화, 안전벨트, 카라비나, 로프 등이 배낭 속에서 대기 중이었다.
당시 암벽 실력이 일취월장하던 때라 겁이 없었다. 솔로 등반을 한다고 여러 번 선배들에게 걸려 혼이 나기도 했지만 대슬랩을 넘어 인수 B 코스로 오르는 길 정도는 가벼운 리치 등반을 하듯 혼자 올랐는데 컴컴한 밤 랜턴에 의지해 오르는 맛이 정말 좋았다. 흐릿한 헤드랜턴에 시각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천 길 낭떠러지를 홀로 오르다보면 마음속의 화는 어느덧 삭혀지고 삶에 대한 무서운 집중력이 되살아났다. 죽기 위해 오르는 길은 아니지만 그 길은 죽음을 도처에 깔아 놓았고 아무리 익숙한 길일지라도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그 두려움을 뚫고 등반을 마친 후 아무도 없는 인수봉 위에 올라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으면 저절로 “휴~” 하는 한숨이 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다행이야. 이렇게 살아있어서”라든가 아니면 또 살아갈 남은 날을 위해 “이제 그만 되었지. 마음 풀린 거지.” 하는 위안의 하나였다. 그리고 준비해 온 라면 하나를 끓여 먹으면 다시 세상에 나가 투쟁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아마도 5월 초순 쯤 되었던 것 같다. 그날도 생리를 하는지 가슴 속에 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어두운 밤 홀로 인수봉을 올랐다. “휴~” 하며 정상에 올라 뜨거운 라면으로 속을 채운 후 찬 바람을 피해 우모복에 몸을 숨기고 찬란한 서울의 야경을 인수봉 위에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더 있고 싶었지만 점점 바람이 차가워졌다. 두터운 우모복을 뚫고 한기가 몰려왔다. 가야할 시간이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도 산에서 배워야 할 겸손의 하나. 하강 코스로 이동해 하강용으로 전락한 로프를 피톤에 걸고 줄을 날렸다. 로프는 팽팽하게 일직선을 그렸다. 하강 코스에서 맞이한 바람. 대단한 바람이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며 수평선을 펼치듯 바람의 방향으로 로프가 걸렸다.
4월말 5월 초가 되면 인수봉의 하강 루트는 항시 강한 바람 탓에 가장 조심해야 할 곳으로 변한다. 계절이 바뀔 무렵이라 서해에서 강한 바람이 들어오는 때다. 북한산 앞까지 막힘이 없으니 바람은 그 강한 힘을 믿고 줄 곳 줄달음쳐 오다가 북한산에 이르면 그만 당황하고 만다. 836m의 백운대와 810m의 인수봉이 긴 골을 걸고 버티고 있다. 그러니 서로 빠져 나가려고 요동을 친다.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의 골은 그래서 바람의 아비귀환이요 난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경쟁 한번 없이 웃으며 온 바람들은 이 좁은 골에 이르러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다투는 형국이니 순간순간 바람도 이런 바람이 없다. 봄이 되었다하나 바다에서 들어오는 바람은 차고 습하다. 인수봉의 하강 루트는 하필이면 인수봉과 백운대 그 사이의 바람 골이다.
그러니 이때가 인수봉에서 가장 많은 사고가 나는 때이다. 하강 루트 쪽에서 연등을 하다 밤이 되면서 여러 명의 목숨을 빼앗았던 대 사건도 이때에 일어났고 낙석 사고며 등반 사망 사고 또한 이때의 기록이 가장 많다. 계절이 바뀌어 시즌이 시작될 때라 사람이 몰리고 아직 시즌에 완전히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차고 습하고 강한 바람에 노출되면서 이런 저런 악연들이 생기는 것이다.
나도 이 골에 있는 산악회 30주년 기념 루트인 “알파30”을 혼자 보수 하러 들어갔다 겨우 볼트 하나를 박고 추위에 입술까지 파래져서 나왔던 기억이 나는데 이때 역시 4월 말이었다. 찬바람에 맛이 간 내 몰골이 당시에 얼마나 처참했는지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앞 다투어 먹을 것과 뜨거운 물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겨울에도 만나기 힘든 강한 바람이 자주 불어오는 계절. 그 날 밤이 아마도 그런 밤이었던 것 같다. 긴 여운을 남기며 하산할 시간. 침낭이라도 가져 왔다면 아침까지 잠을 청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준비까지는 미처 하지 못한 밤. 로프에 팔자 하강기를 걸고 안전벨트에 걸려있던 카라비나를 하강기와 연결한 후 링을 채웠다. 그리고 피톤에 걸려 있던 몸자용 카라비나를 풀었다. 몸자가 풀리면서 팽팽하던 안전벨트가 느슨해졌다. 몸을 약간 뒤로 젖히자 이네 팔자 하강기와 연결된 부위가 다시 안전벨트를 팽팽하게 당긴다. 이제 하강을 할 시각이다. 몸을 낮추고 체중을 이용해 하강기에 걸린 줄을 풀면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몸에 익은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몸을 낮추는 순간 안 그래도 팽팽하던 바람이 갑자기 더 세차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을 감싸더니 갑자기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다.
흡! 비명이 터질 뻔했다. 중심을 잡으려고 발끝에 온 힘이 모였다. 그리고는 날아가지 않기 위해 엉덩이를 낮추고 체중을 무릎 아래로 집중했다. 로프를 잡은 오른손은 땀이 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비록 몸이 완전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오한이 날 정도의 기세였다. 팔자 하강기가 로프에 제대로 걸려 있지 않았다면 산 아래로 추락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바람.
그때 느낌이 왔다. 짧은 머리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눈썹이 날리는 파리한 느낌. 처음 느껴보는 짧은 전율에 몸이 떨었다. 그 느낌은 뭐랄까. 온 몸이 다 날리는 느낌이랄까. 오버행으로 하강할 때 발을 밀며 허공에 몸을 날리는 순간 가슴 아래가 찌릿하며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그런 느낌.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왜 하필 눈썹이란 말인가? 더 긴 머리도 있었는데 감각조차 느끼기 힘든 그런 부위를 통해 전율이 느껴지다니? 오랜 고민 끝에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느낌만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인수봉 위에 설 때마다 늘 생각나는 잊을 수 없는 이채로움이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 느낌은 오래지 않아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나를 찾아 왔다.
머리를 자르는 시기를 몇 번 놓치다 보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더벅머리가 될 때가 있다. 이 때 쯤이 되면 주변의 눈총과 가족들의 성화가 극에 달한다. ‘조만간 꼭 머리를 깎아야 겠다’고 결심을 하며 집을 나선 어느 날, 차고 강한 바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내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머리가 날리며 산발이 되었는데 바람이 지나가는 순간 눈썹 날리던 그때처럼 가슴이 부르르 떨었다. 분명 같은 느낌인데도 왠지 다른 느낌.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그 순간 그 느낌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인수봉에서의 그 느낌은 오한이 나고 살이 떨렸던 느낌이었다면 이 느낌은 마치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선물에 환희를 느끼는 것이랄까. 내심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했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짜릿함 같은…….
생각건대 그 순간부터였을까? 머리가 날리는 느낌이 참 좋았던 것이.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그러나 나는 머리를 기르기에는 알맞지 않은 몇 가지 제약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남성의 머리에 대한 관념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불효라 하여 단발령에 반발해 자결을 한 자들까지 있었다 하는 시대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가 긴 머리를 갖는 것은 사회에 대한 반항이요 부도덕처럼 보이는 시기에 살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적어도 내 세대에게는 아직도 상당부분 유효하다.) 이건 한국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규범이요 역사가 만들어 낸 경직성이니 따로 논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둘째는 내 머리가 건성 모발이라는 데 있다. 건성 모발이니 습성이나 중성 모발에 비해 머리를 감고 말리고 나면 머리가 붕 떠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 때문에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수십 번의 빗질과 잘 하지 못하는 드라이를 한답시고 시간을 잡아먹는다.
셋째는 머리숱이 너무 많다. 건성에 머리숱까지 많으면 머리 건사가 참 힘들다. 부풀어 오를 때의 통제가 힘들고 머리가 조금만 자라도 더벅머리가 되기 일쑤다. 그러니 짧게 쳐버리는 것이 상책이 된다.
넷째는 머리가 유난히 곱슬이다. 곱슬머리 중에서도 자연스럽게 웨이브가 나오는 머리라 생머리를 하고 다니면 다들 파마한 것 아니냐고 물어올 정도다. 한 때는 머리를 조금 길러 스트레이트파마를 두 번인가 했었다. 처음에는 좋은 듯 했지만 머리가 뻑뻑해지는 느낌이 영 아니었다. 이후에는 차라리 머리를 짧게 깎았다.
다섯째는 머리가 너무 늦게 자란다. 이전에는 머리가 너무 빨리 자라는 듯 했으나 요즘은 머리가 자라는 것이 너무 더디다. 8개월을 길렀는데 겨우 귀를 반쯤 덮고 목 뒤를 반쯤 가렸을 뿐이다.
여섯째는 무스나 헤어로션 같은 머리에 바르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때때로 머리를 깎고 나면 미처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이런 것들을 발라주는 경우도 있지만 과히 기분이 좋지 않다. 그냥 머리를 손으로 넘겼을 때 머릿결의 자연스런 촉감이 묻어나는 것이 좋지 머리를 만지는 순간 딱딱한 무언가가 얽혀 있는 느낌은 영 거시기다.
일곱째는 스스로의 자기 검열이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짧고 단정한 바른생활 머리에 인이 박히다 보니 스스로가 긴 머리에 대해 확신을 갖거나 어찌 가꾸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아직 자신의 긴 머리를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이러니 그냥 짧게 깎고 다니는 것이 여러 가지 제약을 단숨에 커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머리를 기를 때면 늘 꺼리는 이것들이지만 좀 다르게 생각하면 이런 제약들은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그 느낌에 일조를 하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거리를 걸으며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것은 건성이고, 곱슬머리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숱이 많은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머리에 무언가 바르는 것을 싫어하니 또한 자연스럽게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자기 검열과 사회의 눈에 대한 극복만 가능하다면 머리를 계속 기르는 것이 요즘 나의 작은 소망이다. 다행이 아내는 아직 내 편이나 나의 어머님은 긴 머리가 영 마음에 걸리시나 보다. 하지만 아들이 이제 길러 보지 않으면 언제 길러 보냈냐는 설득에 그만 반은 넘어오고 반은 넘어오지 않으셨다. 아직도 전화가 오면 대뜸 “머리는 잘랐냐?” 하신다. 아예 “머리 안 자르면 오지 말라” 하신다. 어머니 눈에는 무엇이든 ‘사회가 계량화한 평균치’ 만큼만 사는 것이 최선이고 최고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이 어린 아이가 되어 어머니의 눈을 피해 머리를 기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내 자기 검열의 최일선일 것이다.
아직 내 머리는 다 길러지지 않았다. 귀를 다 덮고 싶지만 한참을 길렀는데도 여전히 귓밥을 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아내의 조언에 따라 머리숱을 치고 나서 머리가 한결 단순해진 느낌이라 좋았지만 머리끝이 여전히 제 마음대로 여러 방향으로 웨이브를 그리는 바람에 관리가 힘겹다. 아침마다 아직 낮선 긴 머리를 어쩔 줄 몰라 한다. ‘조금만 더 길러서 이정도만 되면 보기 괜찮을 거야’라며 스스로 위안을 하지만 아무래도 어색한 머리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다 걷어내지 못한다.
며칠 전 출근길.
삼성역에서 대치동으로 넘어가는 긴 언덕을 올라가며 바람을 맞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모근을 보이며 90도로 솟구쳐 춤을 춘 것이다. 때때로 강력하게 때때로 부드럽게 머리를 흔들어 놓은 바람은 산발이 되어서야 만족한 듯 떠나갔다. 하늘거리는 바람의 여운만이 남았을 때 나는 왠지 짜릿함과 행복한 기분에 취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 들어가 엉망으로 변한 머리를 진정시키며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보았다.
이전에는 “머리를 자른다는 것” 이라는 시를 몇 편 쓴 적이 있었다. 불가의 의식과 더해져 무언가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자름의 미학을 노래했다. 하지만 요즘 문득 드는 생각은 “머리를 기른다는 것”이다. 버리지는 못할망정 주어 담기만 하는 모습은 아닌지, 누추한 욕망의 단편을 채워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다른 이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자신에게만은 늘 들이대는 검열의 단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본 내 모습은 “멋지다.” 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든 걸까? 산발한 모양이 조금 과장하자면 “괴기스럽다”고 해야 할 텐데. 꾸며지지 않는 모습으로 선 나. 그 안에서 나는 ‘무엇으로부터도 속박 받지 않은 자신’, ‘아무것으로도 꾸며지지 않은 본연의 모습’ 그런 모습의 단편을 보고 싶어 했고 또 본 것은 아닐까? 그것을 두고 멋지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문득 다시 생각한다. 기왕이면 입은 옷마저도 다 벗어던지고 거울 앞에 섰다면 어떤 느낌일까? 추했을까? 아니면 그 느낌이 더 지속되었을까? 왜 이제 와서 그런 생각까지 드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은 얇은 후회가 밀려온다.
이렇게 생각하니 머리를 기른다는 것과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어쩌면 동일한 선상의 이야기인 것 같다. 머리를 다듬는 정도의 이발이 일상의 일이라면, 머리를 잘라낸다는 것과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일상에 대한 이탈을 의미한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일상을 털어내고 삶을 등짐으로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일이라면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일상에 의해 제약되었던 본연의 자신을 찾아내 잃어버려지는 삶을 복원하려는 일이다.”라고 말한다면 너무 거창한 것일까?
어찌되었던 좋다. 일상이라 일컬어지는 사소하지만 거대한 제약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명분이 필요하고, 인간의 역사와 사회가 만들어 준 스스로의 검열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많은 논리가 필요하니까.
바람이 분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머리를 흔들어 본다. 머리가 날린다. 바람이 날린다. 머리를 하늘로 춤추게 하는 긴장과 눈가를 스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잔머리의 애틋함이 교차한다. 마음을 동하게 하는 기분 좋은 바람이다. 아. 날아가고 싶다. 나도 “바람이 되어” 날아가고 싶다. 가슴을 활짝 펴 본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지 못하는 발만 지면에 붙어 동동거린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
“아! 바람에 날려 행복하다.”
_ [오름, xd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