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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8 추기경을 추모하며 _ [오름, xdg]

추기경을 추모하며

성직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그 근처까지는 가 보았지만 끝내 성직을 받지는 못했다. 자기성찰적인 동양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나는 계시적 종교인 가톨릭의 교리들이 어느 순간 삶을 옥죄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의심 없이 믿고 있던 바가 갑자기 무너지자 결국 성직을 포기했다. 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한 70%의 학생들이 결국 중도 포기한다는 그 퍼센트에 포함되는 것을 자청했다.

겨우 20대에 삶을 바꾸었다고 말했을 만큼 그 일은 나에게 정말 큰일이었다. 모태신앙과 다름없는 신앙생활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영세를 받았고 열성적인 어머니를 따라 성당을 다녔다. 내 초등학교의 기억은 학교에 대한 기억보다는 성당에 대한 기억이 더 많았다. 학교는 6일을 다녔으나 성당은 7일을 다녔다. 첫 영성체를 하고 복사(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일)를 하면서부터는 거의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다. 추운 겨울 드센 바닷바람을 헤치고 새벽이면 혼자서 새벽 미사를 가는 것이 내 생활의 주요 일과였다. 그때 나이가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도 그 일은 계속 이어졌고 성직자가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길처럼 보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삶이 바뀔 줄은 몰랐다. 내 반란은 도서관에서 일어났다. 열렬한 탐구열. 신화와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초세기 기독교 역사에 집중했고 그 많은 정보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들어왔을 때 당황스러웠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초세기(1-3세기 경)에 확립되어 신앙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쩌면 신의 계시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그것도 지역과 인물들의 정치 투쟁에 의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혔고 그 의심은 정보가 많아질수록 점점 진실에 가까워졌다.

신앙이라는 믿음을 위해 진실을 의심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계시적 종교에서 까논(Canon, 라틴어로 성서 또는 교리, 교회법)에 대한 의심은 곧 믿음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다. 신앙을 전파하고 굳건히 해야 하는 자가 그 근본을 의심하다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마저도 섭리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인가? 열렬한 탐구열은 어느덧 간절한 기도로 변경되었다. 지도 신부가 오히려 기도 시간을 줄일 것을 주문할 정도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대학원장 신부님께서 내게 무릎을 꿇으며 신앙이 깊어지려면 누구나 거쳐 가는 일이니 좀 더 기도하고 공부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간절한 말씀에도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군대까지 다녀오며 인내했으니 참으로 길고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런 내가 성직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도 나의 심정은 그 어려운 결정을 했을 때와 똑같다.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지만 신의 존재는 믿을 수 없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성직을 이어가는 자들. 특히 가톨릭 신부들에게는 무척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향했던 삶이었기에 좋은 감정이 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무리 안에 속해 있었음으로 그들의 삶의 일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탓도 있다. 그들 중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 대부분의 삶 역시 고단한 구도자임을 안다.

언제가 증명서를 발급받을 일이 있어 학교에 간 적이 있다. 방학 때였는데 우연히 후배 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학교를 떠난 지 꽤 되었으니 처음 보는 신학생이었는데 마음이 맞아 돌아오는 길에 동행했다. 그에게 헤어지며 해 준 말은 “기왕 가는 길이면 꼭 성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인들 특히 성직자라면 의당 걸어가야 할 길이 “성인”의 길이다. 요즘 이런저런 구설수에 시달리는 꽃동네 오웅진 신부를 보아도 성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알 수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만나는 인간군상 속에 신을 찾아야 하는 가톨릭 신부들에게 늘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스트레스일 것이다. 모든 스트레스는 늘 행동을 제약하는 자기검열의 발로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한 추기경은 상징적으로도 그렇지만 그분 자체도로 참 대단하신 분이셨다. 우파적 성향이 강한 주교들과 사회적 변화에 동참하고자 하는 좌파적 성향의 신부들 사이에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하신 분이고 나름의 길을 언제나 제시하셨다. 힘든 시대를 강요받으며 사셨지만 그 중 다행이라면 추기경이라는 상징성 안에서 다른 주교들의 행보가 가려져 그나마 교회를 통합하며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법적으로 따지자면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는 동일한 신분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권한의 차이일 뿐 모두 주교로서 성직자다. 가톨릭에서는 지역 교회의 장을 주교라 하는데 해당 지역에서의 사목의 모든 권한을 가진 자이다. 초대 교회가 여러 지역 교회의 집합체였다면 그 각 지역 교회의 장을 주교라 할 수 있고 이들은 12제자와 바오로의 진전을 이은자들이었다. 12제자와 바오로의 사망 이후에는 공의회 등을 열어 각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조율하며 초기 교회의 교리 체계를 만들어왔고 지역을 대표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해 왔다. 이런 전통에 따라 한번 주교가 되면 파문 외에는 해임이 불가능하다. 그에 비해 사제는 주교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성직자가 아닌 성직을 위임받은 자가 사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제는 사제가 되기 위한 직을 받을 때 세 가지 맹세 중 하나인 충성 선서를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교에게 한다. 주교의 권한은 신에게 받은 것이지만 사제의 권한은 주교로부터 위임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 신부가 말썽을 부르면 성직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끝을 볼 수 있지만 주교가 말썽을 부리면 파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국 교회의 주교들은 대체로 강한 우파적 성향을 지닌다. 대부분 6.25를 거친 세대라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데다 관리자로서 상층에 있다 보면 보수적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주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주교가 되었고 한국 교회를 이끌 미래적 인물로 당시 최연소 추기경으로 직을 받았던 분이었으니 그 행로가 참 고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교회는 태생적으로 원죄를 가지고 있다. 비록 신앙의 자유가 이유였다 해도 조선 말 외세를 끌어들여 국력을 낭비하게 했고,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다. 강화도를 침략해 양민을 학살하고 왕조실록을 약탈해간 프랑스의 명분이 순교한 자국 신부들에 두었던 것도, 그 사실을 외국에 알리고 프랑스 함대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것도, 조선의 해도와 산천의 지도를 그들에게 제공한 것도 천주교인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으로는 성인이 되었을지 몰라도 주권국가의 입장에서는 분명 배신자요 매국노이며 스파이임은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원죄를 가진 교회와 영향력 강한 주교들 사이에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추기경의 행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던 명동 성당이 있기까지 추기경은 많은 인내와 설득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주교회의에서 추기경은 한 사람의 주교일 뿐 그것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결코 아니었다. 주교들은 끊임없이 추기경의 행보에 일침을 놓기 일 수였다. 추기경 역시 그런 주교들을 대 놓고 비난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교적 성향이 강하고 계시적 종교에 순종하도록 평생을 교육받아온 주교들이 차즘 신임 추기경의 권위를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추기경은 비로소 자신의 발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시대가 그렇게 만든 면이 강했다. 추기경이 핍박 받는 자들의 앞에서 스스로 목자가 되기 위해 나섰을 때 주교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서야 했다. 오히려 위기에 빠진 추기경을 구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추기경을 살리는 것이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이었음으로.


그런 의미에서 추기경은 원죄를 가진 지난날을, 현대에 이르러 시대정신에 부합되게 행동함으로서 그 원죄를 조금이나마 씻어 내는 쾌거를 만들어 냈고, 교회에게 과거가 아닌 미래라는 큰 선물을 선사했다. 시대정신을 따랐던 그런 노력은 사회적으로도 민주화의 길로 역사의 물길을 돌리는 데 일조함으로서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보루가 될 수 있었다.

이 모두는 추기경의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그 직에 걸맞은 나름의 소명에 제 몫을 다 한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가 바로 “성인”이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 언제든 교황이 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추기경이라는 큰 이름을 헛되이 쓰지 않고 그 감투에 짓눌리어 허둥대지 않고 자기 머리에 추기경의 모자를 잘 어울리게 쓰신 분이 그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그 분의 선종 소식에 여러 사람이 전화를 해서 명동성당에 한번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안부 전화를 했다. 나는 별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분은 그렇게 번잡스러운 걸 좋아하는 분이 아니셨다. 내가 모셨던 신부 중 한 분이 그 분 비서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추기경께서 출장을 가시며 혼자 남게 되어서 추기경 사무실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사무실은 뜻밖에도 소탈했다. 이런 저런 가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후로 오랫동안 인상에 남았다.

언젠가는 티코에 동승해 타고 가시다 그것이 사진에 찍혀 광고에까지 쓰인 해프닝이 있었는데 그 정도로 권위와는 담을 싼 분이셨다.

하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스탠스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셨는데 교구장 자리를 내 주시고 은퇴를 준비하시면서 행보가 변하셨다. 시대의 아픔에 정면으로 도전하던 모양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 사회도 충분히 민주화가 되었으니 교회도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라며 명동 성당으로 찾아와 천막을 쳤던 이해 당사자들을 정중히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교회가 정쟁과 이권 다툼의 장소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사회적 갈등은 이제 사회 스스로 제어할 충분한 역량이 되었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줄어드는 이런 조치들은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그 이후로 언론을 통해 나오는 인터뷰 내용들은 하나같이 보수적 색체가 짖은 말들이 터져 나왔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셨다. 그 분 역시 최고 관리자가 가지는, 그리고 시대와 싸워왔으나 사회의 원로가 됨으로서 가지게 되는 경직성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추기경 자신은 기본적인 마인드로서는 그런 입장이셨으나 시대의 편향성에 저항하면서 좌파적 인상을 남기셨기에 그런 말씀들이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학교로 찾아온 추기경의 말씀이 기억난다. 그때가 교회력으로 축제일이었는지 아니면 학교 기념일 중 하나였는지 모르지만 추기경의 방문이 있었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추기경의 방문은 학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큰 행사였다. 미래의 사제이며 그 중 몇몇은 또 주교가 되어 한국 교회를 이끌 것이므로 신학생들을 정례 방문하는 것은 추기경으로서도 주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추기경께서는 미래의 새싹들에게 무언가 훈시를 하셨지만 그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추기경의 말씀이 있은 후에 학생 대표가 나서서 기왕 오셨으니 하루나 이틀 정도 휴가를 주십사 청원했다. 신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이 의무였고 학교 밖을 나갈 수 있는 기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으니 큰 청원이었던 셈이다.

한참 기분이 좋으셨던 추기경께서는 정색을 하더니 “여우같은 말(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런 뉘앙스의 표현이라 기억된다.)”이라 하시며 주위를 긴장케 하셨다. 그 다음에 한 말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내 이마가 왜 이렇게 들어간 줄 아느냐? (코뼈 바로 위 부분과 눈썹 사이, 실제로 추기경의 이마는 그 부분이 조금 들어가 있다.) 신부들이 하도 속을 썩여서 이마를 짚고 기도하느라 들어간 거다.

그 다음 말은 벌써부터 너희가 이러면 안 된다. 뭐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마에 대한 말씀만은 지금도 가슴에 또렷이 남아 있다. 얼마나 기도를 했으면 이마가 들어갔단 말인가?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이마가 들어가도록 기도를 해야 했단 말인가? 최고 관리자로서의 고뇌와 힘겨움이 함축된 말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으로 대표되는 시국 관련 일들과 사목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부조화 사이의 고민이 오로지 그의 이마에 자국으로 남아 세월을 지냈으리라 생각하니 그 후 추기경을 뵐 때마다 또 세월이 지나 불현듯 말씀이 이전과 달라져 당황스러웠을 때에도 그 말이 생각났다. 30년을 교회를 이끌어오며 교회의 미래와 자신의 후대를 생각해야 하는 분의 고뇌와 고충이 그 한마디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임으로.

말씀의 뉘앙스는 야단치는 말투가 아니어서 신부들 속 썩이는 부분에서는 모두 까르르 웃었던 기억도 난다. 그 소란의 결과는 아마도 하루의 휴가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노련하게도 추기경은 그 일을 학교장에게 위임하셨고 교장 신부님은 추기경의 권위를 생각해 학사 일정에 방해받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마도 라고 쓴 것은 너무 먼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삶이 바뀌었고 신을 버린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 기간을 지내며 나는 참으로 힘겨웠다. 교회와 신이라는 이름을 떨치기 위해 오랜 세월 가슴을 앓았고, “인형을 향하여”라는 시집이 삶을 바꾼 이야기의 결과물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일들에 대해서는 될수록 눈을 감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소식에는 늘 관심이 가고 선종 소식에 이르러서는 그만 가슴이 철렁하고야 만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가 아니 한국 가톨릭교회가 아직도 내 마음 속 한구석에 뿌리처럼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싹 위에 무신론자가 된 내가 있고 아직도 성당에 나가야 한다며 성화를 하는 어머니의 그늘이 있으니.


굳이 명동 성당이나 지역 성당에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는 아들을 달래며 문득 잊었던 옛 성가를 읊조리는 나를 발견한다. 먼 옛적 알았던 아저씨일 뿐인 그가 생각난 것일까?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기를. 천국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있다면 영면하시기를. 허공을 향해 오늘은 간절한 바람을 염원한다.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성지로 만들고 민주화의 보루로 교회가 들어서도록 한 추기경의 지도력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든 지도자에게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꺼져가던 민주화의 동력을 제공하여 오늘을 만든 밑거름이 되었으니 그 한가지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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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