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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8 선택에 관한 간단한 단상 _ [오름, xdg]

선택에 관한 간단한 단상

대략난감

글을 쓰면서 난감한 것은 이런류의 글이 결정론의 신봉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선택이란 때로 선택적이지만 대부분은 맹목적이다.
선택은 애초부터 가치에 대한 수용자의 한계선을 정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어떤 선택은 수용자에 의해 버려지며, 어떤 선택은 취하지 못해 아쉬워하거나 더 큰 슬픔을 주기도 한다. 선택선택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용자는 선택이 수용될 수 있는 충분한 자신의 넓이를 가져야 한다. 최상의 선택은 수용자가 수용 가능한 넓이를 가진 - 딱 들어맞는 가치를 얻었을 때이다. 버릴 수 있는 선택마저도 버릴 수 있는 넓이를 가지지 못하면 삶의 무게가 되어 수용자는 흔들린다. 딱 들어맞는 가치는 수용자의 넓이를 더욱 넓게 만드는 자가 발전의 형태로 성장한다.


선택이 맹목적이 된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수용의 한계를 넘는데 집착해 왔고, 가치를 채우는 일에 목말라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한 분야,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인간 스스로 일등의 가치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사회적 인간에게 주어진 제일의 목표이자 숙명으로 강요된다.


일등의 가치로 올라서기 위해 매워야 하는 자신의 빈자리들은 언제나 선택으로 채워진다. 뛰어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인간은 최상위의 목표를 위해, 스스로 한계를 만든 인간은 그 한계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무언가를 결단하며 선택한다.


선택의 욕구는 소유를 수반하며 권리를 한정한다. 한정이란 뚜렷한 경계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소유의 수반과 권리의 한정이 선택으로 규정될 때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택은 욕망의 일환이다. 욕망은 한계의 굴레를 넓히는 도구이며, 욕망의 표현은 선택이다.


수용의 한계선이라는 외줄 위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인생이고 보면 벌린 양손의 균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선택이란 그 무엇도 가능하나 그 무게만큼은 일정하지 않다. 욕망의 강렬함이 선택으로 함몰될 때 목표는 상실되고 균형은 무너진다. 최상의 목표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최상의 선택을 향한 욕망은 불같고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유혹의 긴 계단을 오르기를 요구한다. 최고의 꼭짓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쳐야만 하는 운명의 유혹이 있고, 또한 이겨내야 할 도전들이 기다린다. 아무 의미 없이 날뛰는 것 같은 야생마도 자신이 가야 할 길과 그렇지 않을 길을 구분한다. 다만 그 길의 끝을 모를 뿐이다.


무엇이 되었건 최고의 꼭짓점에 있는 선택은 유혹의 긴 계단을 오르고 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다. 선택이 갈림길이 되었을 때 지표가 되는 것은 신념과 인내와 투지다.
목표하는 바가 있는가?
목표가 신념이 되면 모든 삶이 그것을 향하게 된다. 머나먼 그 길을 그것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은 인내다. 인내는 투지가 뒷받침될 때 성장하며 활기를 얻는다. 투지가 솟구치는 비법은 열렬한 신념을 갖는 것이다. 선택은 신념의 결과이며, 선택의 쟁취는 인내를 통해 자기 가치를 선택의 폭만큼 넓혔을 때 가능하다. 투지는 선택이 안착되도록 땅을 가꾸는 동력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나의 한발을 내딛게 만드는 신념이 사람을 향해 있었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선택과 손잡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희망이 되는 선택으로 신념이 길을 인도하고 의지가 그 힘이 되며 투지가 그 길을 열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욕망이 들끓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굴레 안에 갇혀 서로가 서로를 밝고 일어서서 오로지 한 꼭짓점을 향해 치를 떨며 가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의 그늘에 한 줄기 햇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꿈같은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선택은 예측될 뿐 미래의 끝은 알 수 없다. 기왕 알 수 없는 끝이라면 유혹에 현혹되고도 운 좋게 성공하는 이들보다 조금 힘들더라도 밝은 세상 (지배하는 것이 아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선택이 내가 가야 할 길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요약하면,
인생을 살아가며 수만 번 해야 하는 선택은 돌아보면 삶이 살아 온 지표다. 선택이란 삶에 대한 오늘의 가치관이며 대부분 미래의 삶에 대한 결과로 다가온다. 인간은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며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그 세상을 형성한다. 기왕에 그 세상이 밝고 아름답기를 염원한다면 모든 개개인의 작은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족 : 얼마 전 다시 탈고한 소설 보물은 자신의 삶이 처한 현실을 만년필옥반지라는 소재를 통해 선택의 가치와 그로 인해 삶이 전환되는 세태를 진지한 어조로 그려본 것이다. 선택의 순간 기왕 한 발을 내딛을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을 향한 밝은 신념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삶이 성장하고, 그 성장이 세상을 향한 맑은 공기가 되면 세상사람 모두 가슴 한 구석에 꿈꾸듯 가지고 있는 이상향을 실현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염원을 담기 위해 노력한 글이다. 선택이라는 용어를 쓰다 보니 문득 다시 소설 보물이 생각난다.



이 글이 쓰인 메모를 보니 2006.2.15이라고 쓰여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시기는 나 자신도 회사도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당시 몸 담았던 싸이버뱅크는 매우 힘들었다. 국내 PDA 폰 시장의 1위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대기업의 시장 진출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사내 개발 스케줄도 고무줄 같았다. 비전과 리더십의 부제로 인한 총제적인 난국이었다. 회사의 기획부서 팀장 자리를 꿰차고 있던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근본적인 대안은 있었으나 난마처럼 얽힌 기업내부의 사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는 계속되어 나에게도 연락이 온 터라 생각이 뒤숭숭했다.

아마도 그때 선택이라는 말이 참 가슴을 아리게 했던가 보다. 게다가 그날 회사의 중요한 파트너에게 내가 차지하고 있는 직책과 업무의 체계 때문에 원하지 않는 메일을 보내야만 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매우 현명하지 않은 결정에 의한 것이었고 앞날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총대를 멨다. 조직에 몸담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런 울컥한 상황이니 시인詩人을 자처하는 자가 낙서에서 시작해 결국 이런 글을 낸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의반타의반 결국 회사를 퇴사했다. 그 동안에도 나는 회사를 이직하지 않았다. 몇 해를 함께 한 동료들에 대한 의리와 회사의 간부로서 어려울 때일수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룬 것은 없었다. 그저 빈손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남았던 그 결정은 현명한 일이었을까 자문해 본다. 결과적으로는 아니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거의 1년을 쉬었다. 그 동안 나는 아들 산이와 정서적인 공감대를 높일 수 있었고 한권의 책을 집필했다. 아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높인 것은 이 시기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며 성과였다. 필집한 원고 역시 거의 마무리되어 원하는 방향으로의 출간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선택들이 나에게 과연 어떤 길을 열게 할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인내가 내 길을 열게 하고 투지가 그것을 뒷받침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한 나의 신념이 결국 또 다른 내 길을 밝은 빛으로 인도해 나갈 것이라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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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름, xdg]